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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서 시인 / 오래된 문
편지함에 새가 둥지를 틀었다 어머니는 하루 몇 번이고 살며시 들여다 보신다 성경을 읽을 때만 사용하는 안경을 끼고 알 품는 모습을 바라다보신다 뒤따라가 엿볼라치면 손짓으로 물러나라 하신다 밭고랑에서 양수가 터져 문고리 잡고 나를 세상에 풀어놓으셨다는 어머니 이것만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어두운 껍질 속에서 이승의 문을 두드리는 부리 어미새가 부서진 껍질을 멀리 내다 버린다 어머니는 문을 나설 때마다 옷고름을 고쳐 매신다 빗장을 단단히 잠그시는 게다 어머니는 옷매무새가 참 고우시다
김영서 시인 / 꽃씨
담장 아래 피었던 꽃들을 기억하며 이 동네 저 동네를 기웃거리지 씨가 여물기를 사랑을 어떻게 잊었느냐고 했더니 묻었다 했다 아주 깊숙이 묻었다 했다 봉숭아 채송화 맨드라미 씨앗을 편지 봉투에 담는다 꽃씨를 찾는 사람이 있어 마음이 흐뭇하다는 말씀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걸요 담장 아래는 버리지 못하고 묻어버린 것들이 많아요 해마다 꽃이 피고 지고 눈길이 서성이고
김영서 시인 / 집이 필요하다
올부터 이장님 목표가 집을 짓는 일이니 주말마다 흙벽돌 몇백 장씩 찍어 말리자고 한다 집을 짓는 일이란 일생일대의 일이어서 숙연해지는 말이다 어릴 적 사랑방살이한 일이 많았다 처음으로 집을 짓던 때 조무래기들이 볏짚을 넣은 황토 반죽에서 뛰어놀아도 아버지는 입꼬리가 내려갈 줄 몰랐다 우선 집 한 채 뚝딱 지어 나에게 주고 한 해에 한 채씩 지어 한달살이라도 좋으니 젊은 사람 마을에 오게 하는 것이 꿈이라고 꿈이란 건 마냥 좋은 것이라서 벽돌을 찍어서 높이 쌓아놓으면 입꼬리가 벽돌 높이만큼 올라가고 혹시 소문이 돌아서 벽돌 체험 한다고 마을에 애들이 몰려올지 모르니 손님 맞을 준비도 해야지 마당이 있는 집 한 채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아침 일찍 마당 쓸고 멍석 깔아놓고 이웃과 함께 별처럼 널브러져도 좋겠다 벽돌 찍을 계획만 세웠는데 벌써 밤하늘에서 별이 쏟아질 기세다
김영서 시인 / 벙어리장갑
나를 기억하는 손은 없나 바자회에 남아 있는 벙어리장갑 그 속에 담겨 있던 평온을 잊었나 잊었다면 의도적이었나 한 번쯤 고맙다는 말 못 하고 나이 먹은 손을 들여다본다 부드러운 손이 거칠어지고 투박한 손이 다시 고와지는 이유를 생각해 내지는 못했다 유품으로 벙어리 장갑을 내놓은 사진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김영서 시인 / 아내의 우산
비를 만나 몸살 났는데 아내는 우산 탓을 한다 알고 있다 나는 아내의 우산이 되어 본 적이 없다
김영서 시인 / 나도 한때는 유령이었다
출근길에 용역 사무실을 나서는 이웃과 마주쳤다 서로 눈이 마주치지 않는 배려를 했다 직장에서 사표를 던지고 나올 때도 그랬다 용역 사무실에는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문이 있는데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날은 하루를 유령으로 살아야 했다 출근한다고 집에서 나왔을 때도 그랬다 궂은날인데 거리는 유령들로 가득했다 해가 질 때까지 둑길을 걸었다 작은 혼령들이 집에 들어갈 시간이라고 속삭인다 발밑의 밥풀꽃이 그곳을 지나는 바람이 잔가지 사이를 폴폴대는 새가 그랬다 집으로 가는데 어둠 속으로 내 그림자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김영서 시인 / 효도관광
할머니 모시고 관광을 다녀왔다 점심값 계산 하는데 술값이 빈병의 몇 배다 할머니가 차안에서 술병을 내보이며 몰래 가지고 왔다고 자랑이다 이제는 뽕짝도 지루해 디스코메들리다 나이 팔십에 파주에서 예산까지 쉴 세 없이 방방 뛴다 어디서 힘이 솟구치는지 지칠 줄을 모른다 차가 흔들린다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짐작으로 넘치는 것을 흘려버리는 것이다 차에서 내리면서 아쉽다고 한다 저장된 용량이 가늠이 안된다
-시와 시<2011가을>
김영서 시인 / 그림자 없는 나무
큰바람이 지나간 뒤 그림자가 사라졌다 집 앞에 두고 힘들 때 마다 잠시 쉬었던 그늘이 사라졌다 가까이 보니 나무가 그늘을 베고 누워계시다 힘겨웠던 게다 그늘에 들 때 마다 나의 푸념을 거두어갔던 나무가 그늘을 베고 상념에 젖어계시다 발가락이 이불 밖으로 보인다 아직 촉촉한 발가락을 바람이 말려주고 있다 나뭇잎이 시들기 시작한다 생각이 깊어지나 보다
<시와 시 2011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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