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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찬호 시인 / 분홍 나막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8.
송찬호 시인 / 분홍 나막신

송찬호 시인 / 분홍 나막신

 

 

님께서 새 나막신을 사 오셨다

나는 아이 좋아라

발톱을 깍고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고

새 신에 발을 꼬옥 맞추었다

 

그리고 나는 짓찧어진

맨드라미 즙을

나막신 코에 문질렀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

님께서는 오직 사랑만을 발명하셨으니

 


 

송찬호 시인 / 겨울

 

 

이것은 겨울과의 계약서예요

죽은 정원을 하나 샀죠

그리고는 서둘러 실내로 뛰어들어 왔어요

 

겨울은 아무래도 따뜻한 난로곁

이야기의 계절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씩 지금이 겨울임을

망각하고 이렇게 묻곤 하지요

우리집 풍자諷刺는

왜 자라지 않는 거죠?

 

이번 겨울은 참으로 길어요

웃고 떠들다 지쳤는지 이제 아이들은

눈트는 씨앗의 입구에 몰려가 있어요

 

창 밖 정원은 여전히 잠들어 있어요

나는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깊은 상념에 잠겨있어요

꽃피고 새 우는 상자

이것의 손잡이를 어디다 붙일까

생각해야겠기에

 

 


 

 

송찬호 시인 /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

입벌린 나팔꽃을 구부려 비비꼬인 숨통과 식도를 만들고

검게 익어가는 포도의 혀끝을 구부려 죽음의 단맛을 내게 하고

여자가 몸을 구부려 아이를 만들 동안

굳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고

 

오랜 회유의 시간으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놓았다

말을 구부려 상징을 만들고

달을 구부려 상징의 감옥을 만들고

이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켜 놓았다

 

달이 둥글게 보인다

달이 빛나는 순간 세계는 없어져 버린다

세계는 환한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달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듯

정교한 말의 장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오랫동안 말의 길을 걸어와

처음 만난 것이 인간이다

말은 이 세계를 찾아온 낯선 이방인이다

말을 할 때마다 말은 이 세계를 낯설게 한다

 

 


 

 

송찬호 시인 / 구두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 넣어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 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송찬호 시인 / 담쟁이 덩굴이 동물해부학을 들여다보다

 

 

오후 세 시, 동물병원은 고요하다

뚱뚱한 의자와

털이 잘 빗겨진 의자와

리본과 방울을 단 의자와

발톱에 빨간 메니큐어를 칠한 의자가

둘러앉아 소근거리고 있다

오늘은 출장 진료도 없었고

전화벨 소리도 조용하다

수의사 김표상 원장은

줄곧 동물 해부학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를 담기 위한

여우의 뇌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창문을 넘어온 담쟁이 덩굴이

푸른 장미를 봉합하려다

실패한 수술가위와

바늘과 핀셋을

끊임없이 간섭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오늘 한 번의 진료가 있었다

모호한 관념과

상상력으로

두통이 심한 환자

자, 미스터 도그씨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보세요

 

 


 

 

송찬호 시인 / 저수지

 

 

저 물의 깨진 안경을 보오

저 물의 젖은 손수건도 보오

물속에 4人가족 자동차가 살고 있소

 

물은 고요하고 깊으오

물의 벽지를 바꿔도 좋소

물의 침대를 새로 들여도 괜찮소

자동차는 바닥의 진흙에 박혀 더 산뜻하오

 

유서는 없었소,

저들은 지상에서

맨몸으로

수 없이 폭풍과 눈보라를 찍었소

그러니, 저 물에 빠진 도끼를 다시 꺼내지 마오

 

저들이 어떻게 사나 가끔씩

돌을 던져보아도 좋소

물가까지 쫓아온 빚쟁이들도 안부를 묻고 가오

 

찢어진 물은 곧 아물 거요

벌써 미끄러운 물위로 바람이 달리고 있소

 

 


 

 

송찬호 시인 /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간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

냉장고 속 냉동된 각진 고기 덩어리의 식은 욕망과

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

 

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서듯

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

미래는 죽었다 산 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한계인가

그 완성을 위하여

세계를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날마다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은

 

폐허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 속에서 우리가 살인자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풍성한 과일을 볼 때마다

그의 썩은 얼굴을 기억하듯

 

여기 그가 잠들다

여전히 겨울비는 내리고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송찬호 시인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경북대학교 독문학과 졸업. 1987년 <우리시대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분홍 나막신』, 디카시집 『겨울 나그네』, 동시집 『저녁별』 『초록 토끼를 만났다』 『여우와 포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