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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미 시인 / 골목의 효능
줄어들거나 늘어나는 신축성의 기원
골목이 마당까지 뻗어 온다
둘이라는 구조 중에서 벽들을 허물어 버린다면 그것은 사라지는 것일까 확장되는 것일까
소리 지르는 고함으로 흐느끼는 등으로 기침하는 창문으로 벽을 쌓아 올리지만 않았어도 오래 머물렀을지도 모른다는 말
진실이 거짓을 뒷받침했다
네가 사라진 것은 짧아진 골목과 커져 버린 주먹
손가락이 가리키는 모퉁이나 그늘처럼 견고한 내성 자라는 넝쿨이나 다리가 되어 감았다 풀어놓는 진행형으로 성장한다
-시집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에서
김유미 시인 / 기일
오래전 그 방에 들어 밥상을 마주합니다
오빠는 등록금을 다 써 버리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언니는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동생과 싸웠어야 합니다 꿋꿋하게 집을 휘저어 놓은 국자들로 변형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젓가락으로 방을 헤집기 시작합니다 나는 국물을 흘리는 국자가 됩니다 눈빛을 건너뜁니다 목에서 생선가시가 살아 움직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반복하는 일처럼 어제 했던 말을 오늘 다시 할 수 있고 어제 놓인 반찬을 다시 놓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밥상을 증식시켰습니다 꾹 다문 돌들을 뱉어 냈습니다
침묵에 달궈진 방이 넘칩니다 국물이 식어 가고 있습니다
김유미 시인 / 오늘의 내부
화분에 이름 하나를 심었다
울컥 피가 돌았다 착각하기 좋은 조건이었고 그림자를 심기 좋은 여백이었다
상자에 넣어둔 시간이 부패하면 달 속에 세워 둔 얼굴이 살아나던,
빛의 방향으로 옮겨 가느라 발걸음이 꿈틀댔다 고개를 내미느라 목이 기울어졌다
뭉클 골절되는 방향 골목에 흩어진 우리의 노래가 빗자루에 쓸려 가는
밤의 조력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거울이라고 불리는 내력들이 조용히 비를 맞으며 젖고 있다
어제를 과용하느라 소파가 쏟아지겠다 달이 동나겠다
화분에서 얼굴이 떨어졌다 되돌아갈 준비가 안 된 표정이었다
-시집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에서
김유미 시인 / 여진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밤의 유리병 속에는 나이거나 흩어진 꽃잎들 웅크린 요일들
너무 아파서 죽지 못한 내 유령들이 문 밖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것
고였다 일어서는 묘지의 바람처럼 간간 휘몰아쳤다 비트의 보랏빛 속살로 차올랐다가 오렌지의 알갱이처럼 툭툭 터지기도 하며
창문을 뚫는 빛들도 흔들리고 있는 의자도 밤의 현기증을 앓을 때
본적지를 찾아가는 것일까 누군가는 몰려다니는 구름을 낚아채 골목을 뒤집어씌웠다 구름 속에서 사람의 숨소리가 쏟아졌다
다시 누군가 의자를 훅 불었다
이때 방향이 없는 의자는 내 어느 쪽에 출구를 내고 어떤 자세로 떠올라 밤의 유령들을 지탱해야 할까요
김유미 시인 /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
초인종이 울리며 택배가 배달된다 나보다도 먼저 달려 나가는 언니라는 얼룩 나는 죽은 언니의 호적을 물려받은 사람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 바람이 입안을 맴돌았다 언니는 후렴처럼 불린다 공중의 틈, 어디를 헤맸나 새의 깃털을 들고 와 나누어 준다 언젠가는 지쳐 있는 나를 잠재웠다가 깨워 주기도 했는데 뒤돌아보면 흔적도 없고 화단의 꽃잎만 흔들리고 있었다 유난히 붉은 그 잎은 그날도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는지 참아야지 어서 자라야지 속삭여 주었다 나를 여닫다 희미해지곤 했다 세 살 어느 봄날 폐렴을 앓고 있는 전설 쑥쑥 자라나 뒤덮고 있다 순한 마음으로 닦는 창문 웃음도 울음도 아닌 감정들이 기웃거리다 사라지곤 했다
김유미 시인 / 이명
언제나 넓고 혼자인 마당 새들이 앉아있는 나무에서는 주파수가 엉킨 잡음 같은 바람에게 등을 내준 양철지붕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장가를 부르던 할머니가 쉼표처럼 한 숨을 쉴 때 문의 손잡이가 밖을 서성일 때 결손의 내 눈빛이 벽을 타고 새에게로 옮아갈 때 뚝뚝 부러지는 울음을 우는 새들로 진동이 울리던 구멍들
오늘은 그 새들이 아팠으면 좋겠어요 외로웠으면 좋겠어요 늙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울음을 데리고 찾아와 내 곁에 누웠다 사라진 것들의 마지막 거처일까
엉킨 기억을 더듬는 바람소리가 마당과 지붕을 식솔처럼 거느리고 와 곁에 눕는다
김유미 시인 / 마술사의 탄생
질문은 우리를 멀리로 데려간다
카드와 카드를 섞을 때 속임수는 카드가 아닌 손가락이 아닌 다만 질문에 있다
흰 곰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흰 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카드를 고르는 건 사람의 몫이었고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신들이 두 손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던 밤 불씨를 지키는 한 사람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여 언어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 최초의 위안의 말에서 마술사의 거짓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자신을 속이는 마술사만이 두 눈을 감고도 빛을 더듬어 단 한 장의 카드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몇 개의 숫자만으로 우주의 별들을 모두 헤아릴 수 있다는 사실과 뒤집은 카드에 얹은 흰 손에 비로소 의심을 가질 때
당신은 실패한 마술사의 표정을 절망한 자의 마름모꼴로 구겨지는 미간을 본 적이 있는가
태초에 질문이 있었을 것이다
속임수는 다만 그의 질문에 있고 우리는 자꾸 카드를 뒤집는다
당신은 어쩌면 흰 곰을 생각할 것이다
- 계간 《시사사》 2021년 가을호, 「신작특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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