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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시인 / 부리가 한 질문
시간을 소분하듯 늘어놓은 대봉시들
"익었니?"라고 콕콕 물어본 흔적들이 맨홀의 입구 같다 미궁 같은 블랙홀 새는 부리 식으로 질문을 던지 고 열매는 껍질 식으로 대꾸를 또 하고 상처는 늘 똑 같은 패턴을 그리고
흉터는 동그라미로 한 번 더 익는다
-《정형시학》 2024년 여름호
이은주 시인 / 분꽃*
어느 겨울 미술관, 이미 지나가고 있을 한 남자를 만나는 중이다
검은 하늘을 이고 있는 하얀 집에서 사는 그 남자, 빨래판 긁는 소리가 나는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굴뚝에서 파도가 연기처럼 피어 오른다 연기 한 모금에 바다 한 귀퉁이가 빨려 들어갔다가, 연기 한 모금에 바다 한 귀퉁이가 흘러나온다 그 연기 속에서 분꽃이, 울고 있다, 까만 아이를 낳고 있다, 아이를 먹은 구름은 수직으로 날아오른다
검푸른 빨래판에서는 절룩이는 파도 소리가 난다 포말처럼 분꽃이 흐드러진다 까만 아이들이 그리움처럼 쏟아진다
*고 전태영 화백의 그림 제목에서
이은주 시인 / 수상한 일
머릿속에는 애벌레들이 우글거려 굼실굼실 몸을 둥글게 말아 추억의 즙을 빨아먹는 놈도 있고 굼틀굼틀 곡선을 그리며 자라나는 초록을 갉아먹는 놈도 있어 몸의 주름을 늘여 미로를 따라 더 예민한 즙을 즐기는 놈도 있지
머릿속이 달콤해지면 벅벅 긁어보기도 해 머리통이 물침대마냥 울렁거려
머릿속이 시큰거리면 통통 두들겨보기도 해 잠깐 사이를 두고, 지지직 소리를 내 엉킨 실을 풀어내기도 하지
날선 밤이 되면 수많은 애벌레들이 몸을 곧추세워 구멍을 내 온통 하얀 나비로 날아오르지
수상한 일이야
이은주 시인 / 솜뭉치
우리는 서로의 입에 솜을 넣어주기로 했다
많은 대화는 우리를 구름 위로 올려주었고 나는 푹신하다고 말하려는데, 자꾸만 입 안으로 하얀 솜이 들어왔다 완성되지 못한 대화는 토막 난 채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인형의 움직임을 보았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양 볼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이렇게 하면 솜이 들어갈 자리가 더 생길 거야 너는 절대 솜을 삼키지 말 것을 당부했다
네가 떠나기 전날 너는 내 입을 꿰맸다
축축해진 구름이 입 안에 돌멩이처럼 구르는 느낌 묵직하고 불쾌함 비구름의 물비린내 침대에서 미끄러진 심장은 파아랗게 멍이 들었다 블루홀 속에 뛰어들자 느껴지는 짜증스런 두근거림 더러운 진동을 타고 오는 통신 네가 완전한 인형이 되었다는 소식 명치가 따가워 손톱으로 살가죽을 긁었다 휴대폰을 열고 닫을 때마다 선명해지는 너의 초대장
솜 인형의 티 파티 오시는 길: 심장의 멍 자국을 따라 걸어오세요!
꾹 다문 입술에서 침이 흘렀다 -푹신한 삶은 어때?― 솜 인형이 된 네가 솜 인형들의 티 파티에서 내게 물었다 너는 축축하고 툭 튀어나온 주둥이로 갈색 홍차를 홀짝였고 바닥으로 흡수되지 못한 액체가 주륵주륵 흘렀다 표정이 없는 우리는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어금니로 입 안의 솜을 씹었다
네가 나를 쳐다본다
지긋이 계속해서
나는 벌떡 일어나 너를 밀쳤다 불끈 쥔 주먹을 네 얼굴에 내리꽂았다 실밥이 터져버리길 바라면서 재봉선이 선명한 네 목을 조르면서
다급해진 인형들이 달려와 양팔을 붙잡았다 너네도 입 안에 솜뭉치가 있잖아 묻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멍청한 인형들의 파티 멍청한 뭉텅이들
손에 잡히는 대로 때리고 할퀴는데 이상하게 조용한 촉감 푹신하고 안정적인 감각 깨진 찻잔의 조각 위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우리
— 제1회 《포엠피플》 신인문학상 당선작 중에서
이은주 시인 / 저물지 않는 저녁
무덤 같은 민머리를 베개에 파묻은 채 때 절은 체취들을 속옷으로 껴입은 채 노후를 침대에 먹힌 녹슨 저녁이 있다
발버둥치는 풍선을 꽉 붙든 비닐끈처럼 절개된 기관지로 거듭 차는 침을 빼며 줄들로 친친 묶여진 인질 같은 긴 여생
딸이 매단 닭 모빌은 자꾸 문을 힐끔대고 통로 향해 귀가 환한 음각 같은 어머니 날마다 저물지 않는 젖은 저녁이 있다
이은주 시인 / 처마 -수원화성
한팔로 감싸 안아 성문을 품은 옹성 비와 눈 떨어뜨리는 검은색 눈썹 돌 돌출된 꿩 머리 치성 감꽃 같은 암문들
모서리 하나 없이 말아 쥔 듯 앉은 공심돈 팔색조 방화수류정, 화성이 펄럭인다 수원을 처마로 삼아 비를 그은 조선의 산
-수원화성 테마 시집 《물고을 꽃성>2023.
이은주 시인 / 도시에서 온 허수아비
들녘을 지키고 선 마네킹 허수아비 땡볕에 나앉아도 달빛 피부 뽐내며 멀거니 논 한가운데 폼을 잡고 서 있다
인상 쓴 표정대신 미색色 웃음 바르고 참새 떼야 오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란 듯 손가락 까딱도 않는다 계절 한 장 쭉 찢긴다
-《정형시학》202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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