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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선 시인 / 풍경화가 있는 구도
이사 간 이웃이 버리고 간 풍경화 한 점 목련나무 아래 비를 맞고 있다 바다 가운데 혼자인 섬처럼 뎅그러니 그 풍경만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림 속은 초원의 여름 집 한 채, 나무 한 그루. 강물 한 줄기 빛의 삼각 구도에 정돈된 순한 얼굴인데 어느 구불구불한 골목을 만나 길을 잃었을까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내 글의 춤사위 엇비슷한 색이지만 하루하루 덧칠하며 같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을 어느 화가의 집념의 구도 서린 듯해서 꿈길 더듬어 나를 찾아온 저 다정한 풍경 액자 속에서 꿈틀대는 순하고 애틋한 목련 나무 아래 비에 젖어가는 섬 하나 우산을 받쳐 내 방으로 데려왔다
정혜선 시인 / 마술피리
대나무 줄기 하날 주웠다 손가락 세 개 굵기에 내 팔 길이쯤 되는 깎고 다듬어 대피리로 만들어볼까 퉁, 퉁 손바닥 맞아가며 집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욕심낸 물건이 제 뜻대로 살아나는 일은 드물다 나무 빗장 요량으로 주워 왔던 나무판은 고기 굽는 날 숯불이 되었고 화단 장식하려고 주워 온 흰 돌은 측백나무 뿌리만 눌러 대고 있고 그렇게 대나무도 뒤뜰 테이블에 던져진 채
그래서 대나무는 살아나는 일에 골몰했던 가보다 떨구지 못한 잎들의 무게에 고개 처박혔던 바람 거칠었던 그 밤부터 바닥을 찍어본 감각을 고스란히 말려 제 마디 속에 넣어 두었나 보다
후퇴를 거듭한 봄기운이 끝내 서릿발로 돌아서던 밤 머나먼 대륙에 포탄 터지는 소리 울렸던가 잘린 대에 음악이 들었다
얕은 바람에도 자주 앓는 소리를 내던 것이 내림 받는 자의 준비였던 모양이지, 신들린 채 음악을 발사한다 탱크가 춤을 추고 기관총이 축포를 쏘아 대는 전쟁을 뒤집으려 살아난 피리라면
공명하는 슬픔이라면 멀리서 죽음을 보고 온 바람이 대 속에 들어 오래 들썩이는 것 같았다
어둠이 진동이다 스스로 음악이지 못했던 대피리 한 줄기 세상의 바람을 거스르는 힘으로 어둠과 싸우고 있다
정혜선 시인 / 안개 짙은 어느 아침
하늘과 땅이 맞닿은 길을 자동차로 달린다 몇 치 앞을 가늠키 어려운 미지의 터널 안에 사물들이 누워 있다
저 앞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늘 다니던 곳이라 익숙하기도 하련만 다시 낯설다 두렵다
알아도 안다고 할 수 없는 저곳에 꽂아 두려 깃발 하나 들고 간혹 무의식으로 의지로 내달린다
이따금씩 '천천히' 표지판과 검은 포도를 가르는 강렬한 황색 선만이 돌아볼 수도 없는 내 의식에 섬광처럼 다가선다
정혜선 시인 / 철새
강물이 서서히 몸을 씻는다 반짝이는 햇살, 조각비누 만지작거리며 꽃소식 올라오자 제 무리들은 벌써 떠났는데 청둥오리 서너 쌍이 여운으로 남았다
무슨 곡절일까
다, 모두 다 떠나도 남겨지는 수가 있다
문득 둘레를 짚어본다 어느 결에 나도 떠나지 못해 남아있는 건 아닌지
정혜선 시인 / 숲과 강물 사이
숲과 강물이 연인 사이라는 것을 요즘에야 눈치챘습니다 나란히 어울려 잇으면서도 무심한 듯 마음결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쩐지 뜨겁던 지난 여름날엔 강물이 숲에게 바람을 일으켜 주고 지쳐가는 오후 햇살에는 숲이 강물에게 그림자를 들여놓더라니요
잠자리 떼가 이따금씩 몰려와 산란 비행을 하는 무렵이면 숲은 머리맡에 붉은 계절 옷 개켜두고 조용히 제 몸을 던져 강물에 녹아듭니다 강물 또 한 말없이 푸른 정을 끌어안고 얕은 물살을 뒤척입니다
저리 별스럽잖게 보여도 둘은 열렬한 사이였나 봅니다
정혜선 시인 / 핼러윈
길을 건너기 위해 길 위에 서는 시간 차가 지나고 바람이 오가고 사신死神을 만난다 그가 찾는 붉은 살갗의 열기 몸의 안쪽부터 뛰는 것에 대하여 바뀐 얼굴을 쓰고 휩쓸리며 쏟아지는 사람들 틈에서 말하지 않았지 쉽게 다치고 물러지고 터져버리는 것 바깥을 견디지 못하는 것 살을 섞는다는 말은 끔찍한 농담이라서 신호등인 듯 먼 데를 보면 립스틱으로 가슴마다 'N' 자를 그리고 물러나는 천사가 있어 실성한 듯 심폐소생술을 해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벌어진 셔츠 위엔 머뭇거리다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어 영영 먼 데로 건너가는 것들 너의 이름은, 물으며 다가오는 그를 알아본다 붉은 벽 모퉁이 돌아가면 희고 푸른 밤을 일으키는 향불이 타오른다고 껍데기를 내어주면 그는 나와 함께 길을 건널 텐데 뺨을 맞는다 정신 차려요! 갈림길에 이르고 팔이 자란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손을 뻗는다 신호가 바뀌고 구멍 뚫린 호박마다 불이 켜지고 너와 내가 자리 바꾸어 걷던 길 위를 나는 지킨다
정혜선 시인 / 폭설 쏟아지는 저녁의 언어 1 오후에 또 폭설이 쏟아진다고 한다 미국 수도 워싱턴의 노숙자들은 도서관이 있어 얼어 죽지 않는다 낮에는 도서관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밤에는 지하철역을 찾아든다 그가 그 한데를 잠자리로 삼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투구벌레처럼 집 한 채를 짊어지고 느릿느릿 걸어간다 사계절 옷가지를 쓸어 담은 검정봉지 손에 들고 노숙의 성지인 뜨신 김 오르는 지하철역 그의 방고래 개어 놓은 이불을 방석 삼아 앉는다 발밑을 구불구불 쉬지 않고 흘러갈 도시의 흉몽들 거미굴 같은 도시의 내장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유난히 귀에 박힌다 2 그때 나는 무척 배가 고팠고 혐오가 한층 위장을 자극했다 하루에도 몇 번을 먹어야 하는 이 짓이 신물 난다 라고 입으로 말할 뻔했다 그가 봉지를 펼치고 튀긴 닭다리를 꺼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의라도 치르듯 씹기 시작했을 때 행인들이 바라보거나 말거나 공을 들여서 먹는 행위만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라는 듯 입을 움직였다 음식을 음미하는지 때때로 좌선하는 승려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3 먹을 것이 넘쳐나는 이 도시에서 노숙자라고 배고플 리 없겠지만 그는 한참을 굶은 사람 같다 공허를 먹고 혼잣말을 먹고 지하도의 탁한 공기를 마신다 과거의 조각들을 오래오래 씹어 삼키고 다시 게워 내어 또 씹는다 음식을 삼키고 나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입속으로만 중얼 거린다 주문이라도 외우는 듯 뜻이 불분명한 영어 겨울 저녁의 지하철역에 그의 먹는 행위만이 클로즈업된다 4 영어로 말할 때 나는 종종 말을 더듬는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언어들 모국어로 치환해도 결국 같은 값이 나오지만 그 끈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다 길들여지지 않는 혀의 습성을 실어증의 한없는 무한 재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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