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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현서 시인 / 수업이 시작되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9.
<동시>

<동시>

김현서 시인 / 수업이 시작되면

 

 

어디선가 짠!

생각이 나타나요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조잘조잘 나를 꼬드겨요

 

분명 내 곁에 있었는데

어느새 운동장에서 나를 불러요

 

내가 교실을 나가면

나 대신 토끼 인형이 앉아

색칠 놀이를 해요

 

눈이 나쁜 선생님은 몰라요

칠판에 올챙이를 그리느라

올챙이가 크면 개구리가 된대요

 

생각은 내 손을 잡고

당나귀처럼 달려요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아요

 

뭉게뭉게 하늘 당근밭에서

토끼 먹이를 구해 교실로 들어가면

 

신나는 수업 시간은

벌써 끝나 가지요

 

 


 

 

김현서 시인 / 백일홍

 

 

나는 노란 꽃 자주 꽃 하얀 꽃

지기 위해 태어난 꽃, 아니아니

 

햇살을 받으면 아름다운 겹꽃으로 피어나

햇살보다 먼저 도착한 환삼덩굴이내 발목을 잡아도

 

나는 노란 꽃 자주 꽃 하얀 꽃

초여름부터 피기 시작하는 꽃

 

꽃밭에 모여든 햇빛이 모두 돌아가고

저녁이 어두운 노래를 부르며 꿈을 접어도

 

나는 백 일 동안 피는 꽃

백 일이 지나면 열매로 남는 꽃

 

-시집 『숨겨둔 말』, 2022, 창비교육

 

 


 

 

김현서 시인 / 덩굴장미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기며

담장의 갈라진 늑골을 따라 조깅하는 자

 

죽음의 홍등을 들고

안개가 두근거리는 무대 위에서

 

 


 

 

김현서 시인 / 섬

 

 

꿈꾸는 섬을 봤다

지도엔 없지만 나는 봤다

 

돌고래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고 했고

 

가마우지는 헛소리 말라며

코웃음을 쳤지만

 

이제 막 알에서 나온 거북은

쪼르르 바닷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따개비야

빨리 오지 않고 뭐해?

 

 


 

 

김현서 시인 / 젖은 행주로 식탁을 훔치다

 

 

꾸덕꾸덕해진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국을 끓여줄게

산을 넘어온 바람을 잘게 썰어

당신 코트에 묻어온 햇빛도 잘게 썰어

따끈따끈한 국을 끓여줄게

주일미사가 끝나고 남는 시간

당신은 발코니에서 풍욕을 즐기고

나는 자질구레한 추억을 썰어

맛있는 국을 끓여줄게

찰기 있는 웃음으로 양념한 식탁에

당신은 앉아만 있어요

화분에 비료를 주고 물을 주고

당신은 창밖 비 그친 거리만 구경하세요

소나기를 피하지 못한 당신 신발은

그때처럼

내가 말려올게

이제 곧 겨울이래요

당신이 온다고 길을 터주던 수화기는

어제로 유효기간을 넘겼고

난 혼자서 식은 국을 마셔요

그리고 나선 평소처럼

 

-시집 <코르셋을 입은 거울> 2006년 천년의시작

 

 


 

 

김현서 시인 / 양파

 

 

붉은 양파망에 양파들이 비좁게 서 있네

어둠을 겹겹이 품은 채

산꼭대기까지 차곡차곡 들어찬 집

 

우두커니 지붕 위 하얀 낮달을 바라보네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인연의

틈과 틈 사이

 

몸을 움츠리고 간신히 빠져나가 골목을 돌면 나타나던

또 다른 골목과 골목이

 

매운 눈물을 쏟아내던 오후의 그 집

후덥지근한 바람이 대못에 걸려 흔들리던

 

벽마다 대못이 박혀 있는 이상한

집들

뿌리가 없는 집집마다 개들은 사정없이 짖어대고

 

엄마가 준 양파는 손가락이 아리도록 까고 또 까도

속없는 꿈

 

가난한 껍질이 쌓여가는 동안

개미들만 바쁘게 붉은 벽돌담을 타고 오르는 이상한 집

 

쓸쓸한 기억이 일찍 끝나버리지 않도록

조용조용 어둠의 세간살이를 늘려놓고 가는

둥근 집들

 

-월간 《시인동네》 2020년 8월호

 

 


 

 

김현서 시인 / 진흙을 이겨 넣은 봄날

 

 

나는 뻘밭에 서 있었다

태양은 다랑어를 대신해서 도마 위에 누워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몸속의 파란 지도가

도끼 모양으로 굳어졌다

길들은 검은 구멍에서 나온 갯지렁이처럼 뒤엉켜

내 발목을 조였고

뻘밭은 눈이 시퍼런 바다와 교미 중이었다

나는 도끼를 꺼내

바다의 하얀 가슴살을 베어

횟집으로 들어갔다

햇볕에 그을린 늙은 아낙이

소주와 갓 베어낸 태양을 먹고 있었다

겨드랑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주머니 속엔 까마귀들이 빙빙 맴돌았고

송이버섯 같은 눈물이 뚝뚝 물새소리를 내며

찬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늙은 아낙이 마시는 건 소주가 아니었다

뻘밭이 토해놓은 피멍이었다

젖은 불꽃과

진흙을 이겨 넣은 봄날이었다

창가엔 해골 같은 술잔들이

칼집 난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눈만 깜박이던 고양이가

바다의 하얀 가슴살을 먹어치웠다

 

-2006. [시와 사상] 여름호

 

 


 

김현서 시인

1968년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 (본명:金鉉順).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현대시사상》 시 당선, 2005년 <아동문예문학상> 동시 당선,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시와 동시를 쓰며 작품활동. 시집 『코르셋을 입은 거울』 『나는 커서』. 동시집 『수탉 몬다의 여행』. 한국안데르센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