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안효희 시인 / 완벽한 시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9.
안효희 시인 / 완벽한 시인

안효희 시인 / 완벽한 시인

 

 

갇힌 내가

완전하게 벽을 마주한 내가

누구보다 많은 시를 그린다

 

교도소 철창에 기댄

내 이름 1507번 8번 9번...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창을 통해

밥보다 하얀 시의 세계, 자유로운 외출

 

한 자리의 수인번호도 없이

한 번의 지문 날인도 없이

남극의 새 가마우지를 따라 가고

높은산세줄나비를 따라 간다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진저리치도록 체험한 후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눌러 쓴 시

꽃샘추위에 산수유가 흔들리고 있다

 

철창 속에서도 죄는 죽지 않고 살아

나날이 달력에 가위표를 그어도

천년을 견딘 구상나무처럼

넘쳐나는 기억으로 울먹인다

 

시간은 너무 더디게 가고

시는 죽음처럼 깊어져서야

손바닥만한 창 밖으로 겨우 빠져 나간다

 

 


 

 

안효희 시인 / 긁힘

 

 

보이는 것입니까 어제는,

종일 책상에 앉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비가 오지 않는 오늘을 살기 위해

닦을 때마다 안경은 점점 맑아지는 것입니까

 

아무도 모르는 접시

실금이 가고 그렇게 토요일이 가고

작은 생채기에서 시작된 진흙에 연꽃이 피는데

 

꽃을 말리듯 풍장 되어 가는 내가

바람을 느낀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길 없음

 

오직 한 어둠을 위해 태어난

칠 벗겨진 팻말이

어두워졌다고 잠들 수 있습니까

 

비 올 때마다 유리창, 그 마음을 닦으면

한 번도 내색한 적 없는

줄줄

흘러내리는 얼굴

 

겹겹, 더 불투명해지는 것을 아십니까

 

 


 

 

안효희 시인 /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

 

 

장작 난로에 불 피우려면

기도하듯 무릎 꿇어야 한다

아니 누군가에게 용서받아야 한다면

장작 난로에 불 피워야 한다

 

신문지 북북 찢어 불쏘시개를 깔고

밤을 견딘 밤나무 잔가지를 모아 불을 붙인다

 

차가워 냉정했거나

얼었던 마음에 불씨 붙일 수 있다면

 

말라

죽어가던 나무가 타닥타닥

다시 살아난다

 

불이 되면서 생긴 갈등과

증오의 부스러기가 연기로 피어오른다

가만히 무릎을 꿇은 자세,

연기를 핑계 삼아 눈물 흘려도 좋다

 

갇혀 있던

불의 씨앗,

생일날처럼 마주 앉아

손바닥 활짝 펼쳐 빈 손을 보여준다

 

바람이 없어도 흔들린다

바람이 없어도 피어난다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

 

 


 

 

안효희 시인 / 치유의 방식

 

 

저장 강박이 아니다

앤디 워홀이 일생 동안 쌓아 올린

가득한 상자들

 

결코 버릴 수 없는 타임캡슐

내 집에도 가득하다

 

읽지 않는 책, 걸려 있는 옷

알리바이를 증명하듯 탑승권과 입장권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나날과

먼지처럼 떠다니는 우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한

수많은 나를 겹겹이 껴안고 살아

 

습자지 위의 붓글씨처럼

지나간 시간이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몸을 긁는다

 

읽히지 않는 푸코의 책 위로

한 무리 아프리카 얼룩말이 뛰고

프라도 미술관에서 산 파란색 가방 속에서

천 길을 낙하하는 빅토리아폭포 물소리가 들린다

 

터키 괴레메 마을의 기암괴석 은밀한 풍화처럼

시간을 먹고 사는 나의 도구들

 

행복보다 중요한 건 불안하지 않는 것

 

상처를 차곡차곡 외부에 쌓아 곱씹으며

수 천 수 만의 장면과 비명으로

이루어지는 치유의 방식

 

오래도록....

 

하지만 변하지 않는 본질은 없어

모든 것 스스로 내려놓는 날이 올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말없는 시간이

곧...

 

 


 

 

안효희 시인 / 근 것이 가진 은밀한

 

 

어항이라는 행성이 있다

지구라는 행성이 있다

 

그곳에는 어떠한 규칙도 통하지 않는 방식으로

아기를 낳고

세 끼 식사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유리창 밖 나날이 거대해지는 굴절된 우주

천억 개가 넘는 태양계와

천억 개가 넘는 은하가 움직인다

내 하얗고 야윈 두 발이 닿는 땅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지...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서는

물고기를 둥근 어항에 기르는 것을 금했다

 

수백 배 확대되거나 굴절되는 세상

둥근 것이 가진 은밀한 야성

 

한 쪽이 거대해질수록 한 쪽은 작고 초라해진다

 

가끔 하늘에서 뿌려주는

알 수 없는 손길에 목숨이 좌우되고

작은 흔들림에도 쓰나미에 휩쓸리듯 출렁

 

거대한 흐름, 거대한 기운으로...

 

산소와 탄소와 물로 이루어진 물질이

흐르고 흘러와

여기

울기도 한다 미친 듯이 웃기도 한다

 

몇 개 희미한 불빛으로

저녁을 견디는

목숨들

높고 둥근 담벼락 아래에서 잠시 중력을 토한다

 

 


 

 

안효희 시인 / 흡연실

 

 

비행기 날아

오르기 직전 그들

은 헐떡이며 유리문 열고 들어가네

원탁의 기사

처럼 둥근 테이블 오직

재떨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내들, 마지막

단꿈에 불을 붙이네

한 번 문이 닫히면 영원한 진공상태,

무중력의 세계

로 전환 된다는 흡연실은

사방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무대

투명한 우리

안에 갇힌 배우들이네

그가 턱을 고이며 말하네 시간에서

부터의 탈출,

탈출이라네 단 한 번의

눈 깜빡거림으로도 한 계절이

지나가는 사이,

굴뚝연기가 솟아오르네

뻐끔뻐끔 금붕어는 살지 않고

수초 또한

흐느적거리지 않는

흡연실, 유리문을 노크하네 사람아

사람아 어서

나와요! 그들은 뼛속까지

활활 타올라 사라져가네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 언덕,

먼 곳 불씨가 깜빡거리네

 

 


 

 

안효희 시인 / 로또아이스크림

 

 

느닷없이

기이하고 달콤한 숫자를 만나고 싶었다

 

화살을 쏘는 짧은 순간

교차하는 수만가지 짜릿한 행복

 

순간의 선택에 생을 걸면 왜 안 되는 걸까

 

로또 뒷면에

유서를 쓰고 죽은 사내

 

자살인가 자연사인가

 

냉장고속의 갖가지 아이스크림

부라브 설레임 투게더 러브미 베리굿 아맛나 캔디바...

 

그것들이 혀끝에서 살살 녹기를 바라며

이루어지지 않는 꿈을 나누어 먹었다

 

같은 DNA를 가진

수면제와 술병이 뒹굴고

 

같은 유전인자를 지닌

로또와 아이스크림이 녹아 뒹구는

 

 


 

안효희 시인

부산에서 출생, 1999년《시와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꽃잎 같은 새벽 네 시』 『서른여섯 가지 생각』 『너를 사랑하는 힘』. 『시와사상』 부주간 역임, 부산작가회의회원, 2017년 제5회 시와사상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