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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해빈 시인 / 어둠 지우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9.
김해빈 시인 / 어둠 지우다

김해빈 시인 / 어둠 지우다

 

 

아이의 어둠이 멈춘 곳은

산머리 절벽 위였다

 

세찬 바람에도 끄떡없던 절벽의 이끼는

백악기에 깨어난 새끼들이었을까

꼿꼿하던 해가 기울면

쉼 없이 질주하는 산양이 되었다

 

반쪽이 잘린 지구 너머로

어둠 비켜달렸지만

새끼의 등 덥석 물고 숲을 벗어나갈

아비의 그림자는 없었다

 

쇠똥구리가 떠나온 강가 모래밭은

빛이 잦아든 어둠의 집

쇠똥 덩어리 굴리며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을 기어올랐다

 

오래전 그들이 그랬듯이

빛의 세기가 절벽으로 치달아도

밧줄 내려줄 어미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둠 속의 어둠

해를 삼킨 태풍이 다시 절벽을 친다

부서진 어둠이 굴러내린다

 

 


 

 

김해빈 시인 / 1인치 나사를 조이고

 

 

입꼬리 올린 사람들이

안전띠를 채우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기우뚱하는 도시를 벗어난다

 

백치가 손짓하는

직선의 길로 접어든 아다다

 

잠들지 못하는 도시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며

가시를 새운 주문을 외며

잘린 산허리를 지나 내달린다

 

자유로 어디엔가

원시 얼굴로

욕망과 체면 다 버리고

모순에 길들지 않은 망초무리 흐드러져 있다는데

 

김포대교 등허리 밟고

과거와 현재 균형을 잇는 1인치 나사를 조이면서

해지기 전

다짐 잊어버리고 되돌아오는 아다다

 

백치의 손목이 저리다

 

 


 

 

김해빈 시인 / 열아홉 번째 응접실을 나오며

 

 

 성문 열기 전

 5마일 언덕을 오른 찰리 채플린

 허리 구부리며 동백 꽃잎에 입 맞춘다

 

 읽고 있던 신문 헤드라인 저울질하며 미소 머금고 회의실과 서재를 거쳐 첫 번째 응접실 카펫 밟으며 들어서는 허스트

 

 미끄러지듯 들어간 주방

 벽 대기의자에 다소곳하던 여자들은 물러가고

 만찬이 끝난 빈 접시에는 거물들 걸쭉한 입담이 쌓인다

 

 전 좌석 채운 극장엔

 찰리 채플린의 익살스러운 흑백웃음이 돌고

 응접실에서 우르르 몰려나간 눈들은

 푸른 물빛을 유형하던 인어가 찰리 채플린과 눈 마주치며 붉힌 천상의 볼을 보았을까

 

 수영장 타일 바닥에 갇혀 부자놀이하던

 내 둔탁한 길을 끌고

 열아홉 번째 응접실을 빠져나오자

 성 밖 바다신 넵튠이 요정들과 키득거린다

 

 태평양 발아래 안개에 싸인 허스트 캐슬

 역설의 땅 거슬러 오른 눈이 시리고 시리다

 

 


 

 

김해빈 시인 / 목각인형

 

 

간밤에 내린 비는 간절한 떨림으로 창을 두드렸지

슬그머니 어둠이 떨어져 나가고

 

안개 속에서 성큼성큼 걸어나오는 대지

 

말귀 닫힌 방,

틀어진 문틈으로 짙은 빛살이 드리워지고

모서리에 기대어 선 그림자 들어 올리는 거미 한 마리

눈과 귀를 닫은 채 숨이 차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집에선

다섯 마리 비둘기 울지 않는다

어머니는

밤낮 이명에 찬 귀를 새우고 허공의 새를 쓰다듬어보지만

마른 날개 우수수 떨어져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어머니, 자꾸만 독백의 언어를 쏟아낸다

'우야꼬야야'

'내가 지금 산구신 아이가

 

'이렇게 오래 살아서 우짜노'

비 그치고, 문을 두드리는 허공의 깊이가

수직으로 되살아나는 방

거기엔, 아흔세 개의 인형이 거미줄 타고 춤을 춘다

 

 


 

 

김해빈 시인 / 진실 혹은

 

 

임진강 물안개 길어 올리던 버드나무

늘어진 가지 사이로

부리를 흔들며 까치가 날아왔다

 

어디서 왔을까

방금 지나간 뱃머리가 보이지 않는데

퍼석거리며 날아든 그 경로

호소력 지은 목소리 들리지 않는다

 

소문의 뭉치들이 귀엣말로 떠도는지

산을 오르며 그린 피마의 설계도

눈총에 부서져 한낮의 거리를 덮었다

 

강가 개개비는 둥지를 떠났고

기웃거리며 본색 드러내던 뻐꾸기는

종횡무진 나발을 불어댔다

 

비밀의 문으로 향하는 길이 막혀

신문로의 진실공방은 중심을 잃었고

입 막고도 흩어진 소문 다 지우지 못한

대치동 지붕 위에 빌딩 외벽을 타고

쏟아지는 조각난 말이 날카롭다

 

 


 

 

김해빈 시인 / 사냥일지

 

 

 나성으로 코요테가 킁킁거리며 사냥하러 간다. 시원한 날씨는 안성맞춤이다. 모노레일 타고 급경사를 오르다가 더 큰 먹이 찾아 강으로 내려간다. 사막 속에 물빛은 더욱더 푸르고 당당하여 그 깊이에 빠졌다. 푸른 눈에 눈먼 코요테, 더 자극적인 사냥터를 찾아 그랜드캐니언에 올랐다. 감히 도전할 자 누구일까. 소름 끼치는 저 붉은 합성, 환장할 희열에 도전했다 아무 말 없이 떨어지는 날개, 높이보다 더 넓은 땅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기죽은 날개 접고 라스베이거스 화려한 숲으로 대박의 활시위를 당겼다. 재빨리 되돌아 온 화살, 신기루가 있는 곳을 향해 희망의 고개를 돌렸다. 눈은 매직 놀이로 더욱더 어지러웠다 무너진 은광 푸른곰팡이를 뒤로하고 황금의 기척을 기다리며 다시 고도를 높였다. 산 정상의 만년설을 퍼다가 축축 늘어져 발길에 감기는 여름꽃들에 전해줄까 인디언과 요세미티 곰의 발자국은 못 만났지만 낯설고 물선 곳의 사냥은 새롭고 신선했다. 애리조나 카우보이를 만난 것처럼...

 투기꾼 없는 넓은 땅덩어리에선 코끼리 꼬리만 만져도 서두를 것 하나 없고 쪽빛 호수 군데군데 마음 급한 걸음만 흥건했다. 공항으로 돌아오는 코요테 꼬리 바짝 내린다.

 

 


 

 

김해빈 시인 / 욱신거리는 계절

 

 

리모컨은 퇴근한 남자의 유일한 권력이다

TV화면을 밀어내고

페로몬 발산하며 침략자들 행렬을 막는 베짜기개미

큰 눈망을 굴리며 개미 유충 훔쳐들고

재빨리 달아나는 잿빛 깡충거미

모두가 나뭇잎을 밟을 수 있는 특권이다

 

여자는 벽 뒤 화면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컴퓨터 화면을 뛰쳐나온

질긴 콩꼬투리를 씹어 삼키던 침팬지 무리가

말라버린 강바닥을 군데군데 파기 시작한다

구덩이에 차오른 물은 오롯이 여자의 집이 된다

 

층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아이들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각자의 집으로 찾아든다

길 건너 고시촌 불빛은 꺼지지 않고

계절을 잊은 30대 청춘의 이어폰에선

건기와 우기를 오가는 고도의 낙차 견디며

날마다 빅토리아 폭포가 울어댄다

 

권력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테블릿PC 화면은

사바나평원이다

 

우기를 불러드린 건기의 방에선

비를 따라 서서히 일어서는 누 떼 뒷다리를 노리며

풀밭을 어슬렁거리는 잠비아 들개들이 몰려오고

북으로, 북으로 말의 얼룩을 헤집는 긴 추격이 시작되었다

 

 


 

김해빈 시인

1958년 경남 창녕 출생. (본명 김해자). 2010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2010년 한국현대시인작품상 수상. 시집 『새에 갇히다』 『원은 시작과 끝이다』 『저녁을 하역하다』 『욱신거리는 계절』 『1인치 나사를 조이고』 『열 아홉번째 응접실을 나오며』. 제3회 한국현대시작품상, 제13회 푸른시학상 수상. 현재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월간 '할올문학'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