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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미 시인 / 달콤한 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8.
손미 시인 / 달콤한 문

손미 시인 / 달콤한 문

 

 

 초희楚姬*

 붉게 터진 네 아기를 찾으러 갈 시간 너는 맨몸으로 딱딱한 무덤을 나와 우주에 떠 있는 고아원으로 가자 측백나무 가지가 길게 삐져나온 별 하나를 찾자 언젠가 지나오는 길에 노란 손수건을 매어둔 것 같은 나무가 있다

 스물 일곱 송이 꽃이 폈고 비로소 우리는 가장 아픈 꼭짓점에 섰지 토성의 달들이 우리의 소풍을 반겨줄 것이다

 

 초희, 달아나자 우주를 향해 네 것인지 내 것인지 머리카락 뜯으며....가는 길 어디쯤 앉아 단 한 번만 춤을 추자 네 시를 비웃던 남자와 내 삶을 비웃던 애인이 모퉁이에서 만나 웃거나 혹은 외면하겠지

 

 문밖에서 우주가 울고 있다

 

 문을 열면 고아처럼 버려진 것들이 젖을 찾아 온몸을 파고들어 초희, 우리는 가서 이름 없는 것들의 어미가 되자

 우리, 가는 길 어디쯤 앉아 별의 꼭지를 잡고 단 한 번만 웃거나 울자 스물일곱 송이 꽃이 졌고

 사자가 먹은 제 새끼를 생각하는 기린 한 마리가 우리를 배웅해줄 때 미리 와서 떠돌던 스푸트니크의 개가 마중 나오는 그림자가 보인다

 자, 이제​

 

*초희楚姬: 허난설헌의 이름

 

​- 2009년 <문학사상> 상반기 신인상 당선작

 


 

손미 시인 / 불타는 의자

 

 

너의 연필을 하나 훔쳐

의자를 그리고

거기에 앉았다

 

네가 가진 것을 훔쳐서

모닥처럼 모아놓았다

 

아무도 오지 않아서

의자 하나를 더 그리고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태워줄게요

 

네가 걷는

좁고 긴 복도에

불붙은 신발 한 짝을 던져 넣는다

 

한여름 불은 고독해서

식탁에 매달려 있다

 

큰 식탁에 앉아

의자를 그리고

옆으로,

또 하나를 그리고

옆으로

불을 끌어안고 가는 너를 향해

옆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우리는 가까이

 

나는 불타는 너를 향해 의자를 옮기며 간다

모든 털을 곤두세운 채

 

아른거리는 식탁 건너편 얼굴을 본다

 

너의 연필을 훔쳐 의자를 그리며

한칸씩 옮겨가고 있다

 

매일 불타고

매일 죽어버리는

거기로 매일

 

밝아지고 있다

 

-계간 《시마(魔)》 제13호, 2022년 09,

 

 


 

 

손미 시인 / 장마 병원

 

 

실종된 개가 나를 물고 나타났다

 

나는 통째로 녹아내릴 수도 있다

뼈를 태우는 공원에서 어린 동생이 울었다

 

오랫동안 숨이 끊어지지 않는 사람

이제 그런 것은 무섭지 않다

 

장마에 떠오른

발자국은 이 세상에 없는 거다

 

침대에 묶인 사람들이 산 채로 탔다

 

다 탄 사람이 덜 탄 사람을 기다려 함께 갔다

타는 사람이 천천히 손을 들어

벽을 할퀴고

불이 먹은 머리와 밤과 딸이

 

끈적한 살을 부딪치며

흰 잔에 절했다

 

침대에서 불타고 있는 사람을

오랫동안 면회 가지 않았다

 

비를 흠뻑 맞은 나무가

무서운 걸 그렸다며 내게 주었다

 

나를 그린 그림

 

 


 

 

손미 시인 / 빗방울

 

 

어디예요?

 

 모르는 동그라미에 서 있어요

 

 들어가려고요?

 

 돌을 던졌어요

 출구로 퍼져나가요

 소문은 어디까지 가는 걸까요

 

 나는 나를 뚫고 있어요

 밤새도록 황소가 붉은 천으로 돌진하는 장면을 봐요

 

 달아나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운동장에는

 모여드는 살의가 있어요

 너의 핸들을 잡아 틀고 싶어요

 

 어디예요?

 

 떠도는 동그라미이요

 점점 퍼져가는 나요.

 아직 건너오지 못한 나를 이상하게 보는 동그라미이요

 

 구부러진 등을 쫓아가며

 거기에 창살 하나를 꽂고

 밧줄을 뱅뱅 돌려

 동그라미를 던지려고

 

 나의 재앙을 가져가는 황소

 나 대신 동그라미에 들어간 것들에게

  

 어디예요?

 

 테두리에서

 동그라미는 계속 커지고

 쟤가 그랬어, 라고

 나는 동그라미 속에 말했어요

 

 소문은 어디까지 갈까

 침대에 누운 너의 살 속에서 날뛰는 도는 황소

 

 어디예요?

  

 끊어진 곳을 찾는 동그라미요

   

 나는 콜라를 마시면서

 네가 나오길 기다려요

 

-『현대시』 2022 9월호 중에서

 

 


  

 

손미 시인 / 회전 테이블

 

 

중국 식당에

혼자 왔는데

테이블이 돌아간다

 

왜 따뜻한 음식은 멀리 있나

정말 저기에 네가 있었나

서로에게 밥을 밀어 주었나

그렇게 따뜻했었나

 

느리게 테이블이 돌아가는데

삐걱대며 돌아가는데

목마에 앉아 한 바퀴 두 바퀴

그러면 건널 수 있다고 믿었나

만날 수 있다고 믿었나

 

저쪽에서 누가 울고 있나

안 보이는 거기에 넌 아직 있나

테이블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이 나나

나는 숟가락을 어디에 놓아야 하나

 

혼자 식사하는데

왜 테이블이 돌고 있나

허겁지겁 사랑은 끝났는데

왜 테이블이 다시 오나

저쪽에서 누가 울고 있나

젖은 테이블이 왜 이리로 오나

식은 밥이 빙글빙글 돌고 있나

왜 다시 오나

 

 


 

 

손미 시인 / 빙하

 

 

일년에 몇 센티씩 얼음은 밀려난다

 

그러니 나는 가고 있다

아주 조금씩

 

우린 아주 오래됐다

기다리는 동안 모두 얼음에 타 죽었다

 

잃어버린 신발이 흘러간다

뒤집힌 나의 손

 

나는 잘라본다

미안하다

 

내가 잘라서 버린 너는

아직 살아 있나

나는 잘라본다

 

다시 만날 때까지

 

나는 가고 있다

느리게

 

나와 함께 가자

불타러 가자

 

보지 않고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

아직도 따뜻해서 미안하다

 

아주 오랫동안

간다

 

서로에게

 

 


 

 

손미 시인 / 마지막 얼음

세상에 하나의 얼음과 나만 남았다

땅을 밟고 걸을 때 찰랑찰랑 몸속에서 물이 넘친다

저기 얼음 속에서 누군가 탁 불을 켰고

내가 삼킨 단추들

안에서 걸어 잠갔던 단추들이

입술을 달싹이네

돌멩이를 던져 보았지

반짝, 얼음 속에서 빛이 켜진다

이곳에 둥둥 떠다니는 튜브들

물을 잠그는 단추들이

조용히 흘러가는 쪽으로

얼음 속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는데

나는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손미(孫美) 시인

1982년 대전에서 출생.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문화콘텐츠학 박사과정. 2009년 《문학사상》 상반기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 2013년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시집 『양파 공동체』 『사랑을 해도 될까』. 산문집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상합니까?』. 현재 모교인 한남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