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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규 시인 / 사랑의 기울기
구름아! 예쁜 구름아! 무슨 일이 있어 그리도 급하게 달려가느냐? 네 몸이 부서져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급한 일이더냐 유혹이란 녀석의 목소리는 달콤하지만 행복보다 불행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태규 시인 / 굴신屈身
국수만큼 너그러움도 없지 자신을 굽히기 위해 펄펄 끓는 물을 끌어안지 뜨거워진 몸을 이내 찬물로 뛰어들라 해도 마다하지 않지 그릇의 모양에 연연하지 않지 그저 그릇대로 허리를 굽히지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져도 제 몸을 내줄 뿐 양념 맛이라는 평가에도 아무 불평을 하지 않지 축 늘어진 자신을 태양에 딱딱하게 말리던 때를 어떻게 잊겠어 마른국수가 되어 팔려나가던 꼿꼿한 자존심이 쉽게 잊혀지겠어 밤이 깊어질수록 포장마차 집 부부도 함께 굽히지.
이태규 시인 / 사소함을 다는 저울
아침에 창문을 열다가 창문과 방충망 사이에 포위 된 모기를 보았다 밤새 내 귓전을 오가며 잠을 설치게 한 놈이다 잡아버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갈등의 방충망을 열었다 모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 출근하려고 대문을 여는데 문간에 앉아 있던 모기 한 마리가 얼굴 앞을 날아다니며 신경을 건드린다 손을 흔들어 쫓아버리고 나서 출근하는 차안에서 생각했다 모기가 고맙다고 한건 아니었을까 내려치는 내 손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소함을 다는 저울은 늘 수선하지만 고장 나기 일쑤다
이태규 시인 / 연꽃
절간 주차장 입구에 “만차”라고 쓰여 있기에 차를 밖에다 대고 들어갔다 주차장에 들어가 보니 텅텅 비었다 절간 양반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중얼거리며 법당에 들어가 큰절을 하고 부처님께 소원을 빌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부처님이 뒤에서 한 말씀 하신다 “이 사람아!, 시주는 하고 가야지” 나도 돌아서서 대답한다 “소원 성취하면요” 불이문을 나오려는데 누가 뒤에서 휙 하고 모자를 낚아챈다 얼른 연꽃이 받아쓰고 빙그레 웃는다 부처님은 연못에서 만발하고 계시다
이태규 시인 / 왕 도둑놈
동네사람들에게 도둑, 저놈 도둑놈이야, 도둑놈이라니까 라는 소리를 듣고 사는 어느 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 집 개들이 유난히 짖어댄다
“나도 네 주인처럼 도둑놈인줄 아니?” 라고 중얼거렸더니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개들이 더 세차게 짖어댄다
하기야 산다는 것이 세상 잠깐 빌려 쓰다 가는 것인데 누가 주인이며 누가 도둑인가
아직 그런 이치도 모르고 살아온 내가 왕 도둑놈이었네
이태규 시인 / 촛불
촛불이 타면 그림자도 함께 탄다 불빛도 없이 열기도 없이 소리도 없이 검은 몸을 태운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몸이 흔들리고 길어졌다 줄어들다가 넓어졌다 좁아졌다가 차가운 몸을 태운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제 몸이 왜 타는 줄도 모르면서 촛불이 타면 그림자도 함께 탄다
이태규 시인 / 투명함에 대한 오해
집을 수리하다가 마당에 버려진 깨진 유리창 유릿날들이 나를 겨냥하고 있다 늘 반질거리는 것에 대하여 조금 못마땅해 하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원한 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 작은 빈정거림에 속이 많이 상했었나 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유리조각을 주워 재활용봉투에 넣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 풀숲에서 아직도 살기를 꺾지 않고 노려보고 있는 유리 파편들을 보았다 유리는 늘 투명해서속도 없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의 속보다 보이는 것의 속이 더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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