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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태규 시인 / 사랑의 기울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8.
이태규 시인 / 사랑의 기울기

이태규 시인 / 사랑의 기울기

 

 

구름아! 예쁜 구름아!

무슨 일이 있어

그리도 급하게 달려가느냐?

네 몸이 부서져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급한 일이더냐

유혹이란 녀석의 목소리는 달콤하지만

행복보다 불행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태규 시인 / 굴신屈身

 

 

국수만큼 너그러움도 없지

자신을 굽히기 위해

펄펄 끓는 물을 끌어안지

뜨거워진 몸을

이내 찬물로 뛰어들라 해도

마다하지 않지

그릇의 모양에 연연하지 않지

그저 그릇대로 허리를 굽히지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져도

제 몸을 내줄 뿐

양념 맛이라는 평가에도

아무 불평을 하지 않지

축 늘어진 자신을 태양에

딱딱하게 말리던 때를 어떻게 잊겠어

마른국수가 되어 팔려나가던

꼿꼿한 자존심이 쉽게 잊혀지겠어

밤이 깊어질수록

포장마차 집 부부도 함께 굽히지.

 

 


 

 

이태규 시인 / 사소함을 다는 저울

 

 

아침에 창문을 열다가 창문과 방충망 사이에

포위 된 모기를 보았다

밤새 내 귓전을 오가며 잠을 설치게

한 놈이다

잡아버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갈등의

방충망을 열었다

모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

출근하려고 대문을 여는데 문간에 앉아 있던

모기 한 마리가

얼굴 앞을 날아다니며 신경을 건드린다

손을 흔들어 쫓아버리고 나서 출근하는

차안에서 생각했다

모기가 고맙다고 한건 아니었을까

내려치는 내 손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소함을 다는 저울은 늘 수선하지만

고장 나기 일쑤다

 

 


 

 

이태규 시인 / 연꽃

 

 

절간 주차장 입구에 “만차”라고 쓰여 있기에

차를 밖에다 대고 들어갔다

주차장에 들어가 보니 텅텅 비었다

절간 양반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중얼거리며 법당에 들어가

큰절을 하고 부처님께 소원을 빌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부처님이 뒤에서 한 말씀 하신다

“이 사람아!, 시주는 하고 가야지”

나도 돌아서서 대답한다

“소원 성취하면요”

불이문을 나오려는데 누가 뒤에서 휙 하고 모자를 낚아챈다

얼른 연꽃이 받아쓰고 빙그레 웃는다

부처님은

연못에서 만발하고 계시다

 

 


 

 

이태규 시인 / 왕 도둑놈

 

 

동네사람들에게 도둑, 저놈 도둑놈이야, 도둑놈이라니까

라는 소리를 듣고 사는 어느 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 집 개들이 유난히 짖어댄다

 

“나도 네 주인처럼 도둑놈인줄 아니?” 라고

중얼거렸더니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개들이 더 세차게 짖어댄다

 

하기야

산다는 것이 세상 잠깐 빌려 쓰다 가는 것인데

누가 주인이며 누가 도둑인가

 

아직 그런 이치도 모르고 살아온

내가 왕 도둑놈이었네

 

 


 

 

이태규 시인 / 촛불

 

 

촛불이 타면

그림자도 함께 탄다

불빛도 없이

열기도 없이

소리도 없이

검은 몸을 태운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몸이 흔들리고

길어졌다 줄어들다가

넓어졌다 좁아졌다가

차가운 몸을 태운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제 몸이 왜 타는 줄도 모르면서

촛불이 타면

그림자도 함께 탄다

 

 


 

 

이태규 시인 / 투명함에 대한 오해

 

 

집을 수리하다가

마당에 버려진 깨진 유리창

유릿날들이

나를 겨냥하고 있다

늘 반질거리는 것에 대하여

조금 못마땅해 하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원한 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 작은 빈정거림에

속이 많이 상했었나 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유리조각을 주워 재활용봉투에 넣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 풀숲에서 아직도 살기를 꺾지 않고

노려보고 있는 유리 파편들을 보았다

유리는 늘 투명해서속도 없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의 속보다 보이는 것의 속이 더 깊다

 

 


 

이태규 시인

충남 보령 출생. 단국대 일어일문학과,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2001년《문학공간》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향기의 나이테』 『쥐악상추』 『반사된 세상』 『왕 도둑놈』 『허둥지둥』 『그리움으로 가는 파도』 등. 2018년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詩人賞)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