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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정 시인 / 내 안의 블루
낙석 하나가 분화를 꿈꾸는 지층을 깨우듯 내 몸을 흔드는 정체불명의 힘, 블루라는 낯선 말이 간간이 극장 포스터나 술집 이름으로 등장할 때에도 뭐 현대인의 색다른 기호나 유희성이겠거니 하다가 자갈치 물양장에서 은하호를 보는 순간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어
전선과 전선이 담쟁이 넝쿨처럼 우거진 교각 밑에선 노약자 노숙자들은 노을과 놀고 관리들은 꼬리 잘린 도마뱀과 놀고 공적자금은 밑 터진 독과 놀고 우울이 껌처럼 늘어붙는 거리 평생을 구두 발자국만 새긴 어느 판화가의 생애를 위해서라도 어디로 떠나가 줄까 더 이상 발자국을 뜯어 먹히기 싫어....그러니까 얼마나 이 땅의 기다림과 그리움들이 다했으면 덧문을 닫아 걸 이 나이에 나를 끌어내는 정염의 덩어리를 찾아 맨발로 99톤 은하호에 오르기 전에
가방에 담았던 면도기 치약 몇 권의 노트를 꺼내고 내 그림자와 백병전을 벌이던 몸통을 쑤셔 박았지 자크를 열고 나오려는 팔다리를 우둑우둑 분질러 다져 넣으며 나도 모르게 죽어서 다시 살아! 손에 묻은 분진을 털며 외쳤어
서규정 시인 / 끼니
바늘이 끼니였다 마른 호박잎 소리 없이 지듯 가세가 몰락하면서 어머니, 소쿠리를 들고 남의 밭둑을 지나가는 악극인처럼 시키지도 않은 춤과 재담을 늘어놓고도 늘 빈 소쿠리로 돌아와 바늘 하나 꽂을 땅이 없던 그 들판에선 끼니가 바늘이었다 더더구나 강물은 강둑을 타고 넘실거려 낮은 추녀 밑에서 오돌오돌 떨며 바라보던 마당엔 비도 빛도 다 바늘만같아선 오냐! 끼니를 얻으려면 먼저 미끼가 되어야지 어머니 연분홍 치마를 들쳐 입고 서울로 떠나던 역전에서 아이스케키 하나에 금방 치맛자락을 놓고 떨어졌지만 무엇인가가 손등을 타고 녹아 흐르고
소식보다 바람이 한 줄 빨랐을까 낚싯줄처럼 늘어진 빨랫줄 끝으로 몰린 어머니의 고쟁이가 깃발처럼 나부낄 땐 만세를 불렀던가 말았던가 만세나 항복은 왜 똑같은 동작으로 두 팔을 들다 마는지
-《시와사람> 2007년 봄호.
서규정 시인 / 안개, 창
보라, 빈틈조차 보이질 않듯 창으로 태어나 창으로 죽는다 너나 없는 요즘 사십대들의 초상이다 군대도 다녀오고 직장도 있고 가정은 단란하다 그러면서 또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퍼먹고 찌르고 또 찔리고 난동을 부리다, 아침이면 경찰서에서 풀려나기도 한다 살아간다는 업을 업고선 경범은 애교일 뿐이다 안개는, 사방팔방이 다 정면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올 대통령이 좌파를 건너 뛴 몽유파인지 몰라도 밥 먹고 사는 데는 하등의 불편함이 없다 산복도로, 중년여인이 헛 뜨개질로 뜨는 먼 그리움처럼 구멍가게 앞을 허적허적 올라가는, 이 도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창이다
뱃고동이 걷히기를 기다려 멀쩡한 기담들이 시작되고 대문은 햇빛 쪽으로 활짝 열려 있다
-시집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작가세계, 2013)
서규정 시인 / 불타는 시장
숭어와 가물치가 같이 솟아올랐다가 소나기처럼 송사리를 까 퍼붓는다 해도 구포시장에선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비상구가 그렇게 없기로서니 줄담배 연기 속으로 자신을 피신시키듯 안개꽃을 파는 리 어카 행상이 꽃 속으로 숨어드는가 하면
부처님 맏며느리가 되고도 남을 둥글둥글한 여인이 젖먹이를 토닥이며 발가락을 내다 팔고 있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진흙 묻은 한 소쿠리 땅콩이다 구포 장날엔 없는 것만 빼놓고 다 나온다
그림자 황혼을 일으켜 세우는 불붙은 시간까지
《주변인과문학》 2019. 겨울호
서규정 시인 / 나는 어느 날 비 내리는 운동장 느티나무 밑에 서 있을 것이다
사는 것보다 죽는 일이 더 힘들다는 것을, 이웃에 살던 주정뱅이가 숟가락을 던졌다는 말을 들었을 땐 그저 시큰둥해서, 잘 갔네 리모컨이 필요치 않은 곳으로!
티브이를 켜면 시민단체 집회에 맞불을 놓는 로보캅 같은 보수단체들이 반대 시위 하는 장면이 반복 방영되는 화면을 잘도 떠났으니
어제나 내일이나 얼마나 다스리기 불편한 리모컨일까
동네 사람들이 데모부부라 왜 부르는지는 몰라도 틈만 나면 시위 현장에 나가 목이 터져라 무얼 외쳤는지, 역시 그 무렵에 눈이 맞아 만나 같이 살았다는 마누라는 그의 머리맡에서 방바닥을 두드리며
힘내라 힘!
젖 먹던 힘까지 써야 이 술을 받아 마실 수 있어, 반절은 쏟고 나머진 흘리며 소주 한 방울을 혀끝에 달고 천둥 벼락까지 동원된 들창문이 동녘처럼 훤하게 밝았을 때 꼴깍 숨을 넘겼다는 말을 들었지
공공근로를 할 때다, 만나기만 하면 강산이 변해 남들 다 잊어버린 혁명가요를 줄줄 외우며 어이 인텔리겐치아 당신 시를 쓴다던데 시운동은 안 합니까 가래침을 아시안게임에 나간 역도선수처럼 들어 올리던 그 탁한 목소리!
벅차야 했다, 산 세상보다 한순간을 넘겨야 할 숨이 그리 벅차다면, 나는 어느 날 비 내리는 초등학교 운동장 느티나무 밑에서 입을 멍하니 벌리고 먹구름을 바라보며 오래오래 서 있을 것이다
서규정 시인 / 빨래
네 그리움이 남아 있느냐 쉬었다가 익어간 탱자의 하늘이다 빨래가 쉬이 젖는 희망이라면 살아가는 절망 여태 마르지 않았니 소나기와 똑같은 빛으로 타오르기 싫어 척박한 등 뒤에 사다리 같은 등뼈를 남겨 놓았다
내 눈에 채찍으로만 보이던 지평선이 푸른 탱자 눈망울을 팽이로 돌리고 돌리면 어지럽게 돌아보고 돌아보는 앞마당 빨랫줄을 타고 앉은 하늘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고
포로로 잡혀 있던 선녀들이 너울너울 춤추며 있다 하나씩 골라잡아 천년만년 같이 살 선녀가 아니 아니 내 옷이더란 말이냐 그렇게 만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이
서규정 시인 / 뿌리 깊은 나무들은 거꾸로 선다
한 잎 두 잎 떨어진 노란 은행잎처럼 손바닥을 쫙쫙 펴고 가을 지나 겨울나라로 모두모두 가고 있다 함께 간다는 기쁨이 너무 커 삶은 얼마나 뜨거워야 얼음이 되는지 봄은 또 아지랑이로 기다리고 있는지 조심조심 가는 손떨림만으로 이 흙 이 땅을 움켜쥐고 디디고 두드리다 못해 우리가 기꺼이 물구나무를 서야만 했던, 직립의 이유일 것이다
-계간 <시와사상> 2012년 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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