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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시인 / 거울 속의 사막
거울 속에 사막이 있다.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앞으로 가야 하는 얼굴이 있다 바람이 머물다 간 곳에 만들어지는 사구들 바람은 질서에 불성실했으므로 사막이 바람의 알을 사구로 키웠다
한없이 높기만 하던 계단 그 무수한 三자들 같이 흐르지 못해서 생긴 미간 사이의 川자는 깊이도 패였다 혼자가 두려워 짓밟히면서라도 같이 하고자 하던 八자의 시간도 있었다 거울 속에서 낱낱이 드러내는 맨얼굴 골谷 패인 넓디넓은 사막이다
군데군데 숨겨진 오아시스는 종종 신기루같은 것이어서 그들의 기록은 믿지 않기로 한다 까마득 빛나는 이들도 믿지 않기로 한다 허망한 모래의 기록이 깊이 판 박혔다
화장은 무성의한 바람의 행적을 덮는 일 오래된 골谷은 좀처럼 덮어지지 않고 살수록 곳곳이 함정인 부실한 사막엔 사구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선희 시인 / 불륜
공원 벤치 등나무 참나무 굳게 휘감고 꽃을 피우더니 두 나무 사이 햇볕 한 발짝 들어서지 못하게 하더니 부둥켜안은 모습 아픈 사랑 같더니 꽃 피웠던 자리 무너졌다 가지치기당한 두 나무 꽁꽁 묶여 벤치 옆에 놓여 있다
이선희 시인 / 배롱나무의 혁명
온종일 초록으로 묻고 초록으로 답한다 숨가쁜 염천, 속속들이 초록인 삶들 보도블록 틈새의 초록 병사들 밟혀도 다시 살아나는 훈련 한창이다 아무도 초록을 상대로 초록 아닌 삶을 말하지 않는데 칠월 염천에 배롱나무 꽃핀다 반란이다 나이들수록 의상은 고와야 한다며 생전에 꽃분홍옷 자주 입던 꽃그늘 할머니 배롱나무 혁명집단의 수장 돌아가시고 배롱나무꽃 진다
이선희 시인 / 애드벌룬
줄 하나만 있으면 하늘 끝까지도 오를 수 있겠다 기회만 되면 붕붕 떠오르는 가벼움 줄 하나에 의지해 오만과 탐욕과 착각을 가득 끌어안고 부풀어 오른다 얼마 후에 찌그러지겠다는 꼬리표가 속절없이 펄럭인다
굳세게 땅을 딛고 살려고
발바닥은 굳은살 박아가며 단단해지는데 내 어디에 생긴 구멍들일까 수시로 들락거리는 헛바람 어디서 불어온 헛된 망상일까 빵빵한 기대 아무리 꽁꽁 동여매도 빠져나가는 탱탱한 生
허공에 떠 있는 찌그러진 애드벌룬 질기디질긴 줄에 매달려 뒤뚱뒤뚱 목을 끊을 수도 줄을 끊을 수도 없다
이선희 시인 / 내가 나를 알 수 없는 이유
벚꽃잎 떨어진다 꽃잎 하나 팔랑 날아가더니 보리밭에 앉는다 꽃잎의 의도야 무엇이든 보리는 꽃잎을 보며 자란다 자라면서 어느 순간 꽃잎은 사라져 보리의 기억 어디에도 꽃잎의 흔적은 없다 보리 알갱이가 벚꽃잎을 닮았다는 사실 보리는 모른다
이선희 시인 / 푸른콩나물
콩나물 봉지를 차에 싣고 여름날 종일 돌아다녔더니 콩나물 대가리가 새파래졌다 세상 빛 차단하고 안전하게 지내다가 꽁꽁 묶여 환한 세상 이곳저곳 끌려다니려니 퍼렇게 멍들 만도 했겠다
콩나물대가리 이파리로 변신하려는 시도
세상 한 번 살아보겠다고 반질반질 노랗게 모자 벗은 얼굴들 거기에 이파리 화석같이 주름살 그려 넣는 것도 콩나물이나 나나
펄펄 끓는 세상 속 뜨겁고 맛나게 살고프지만 거기까지 가는 선별 과정 만만치 않다
이선희 시인 / 변형되는 중
굽은 허리에 채머리 떠는 노파 오랜 기간 많은 문제들에 집중하느라 변형된 체형이겠다
너무 어려워 흘려버린 문제들은 강펀치로 돌아와 노파의 뒤통수를 쳤을 것이고 난해해서 밀쳐두었던 지문들은 꿈틀꿈틀 질겨져서 그의 허리를 감아 내렸을 것이다
풀어야 할 문제들이 쌓여간다 정답은 쉽게 나타나지 않고 높아진 난이도에 관계는 이러저리 꼬여간다 이 문제들이 다 풀리고나면 남은 생이 좀 수월할 것도 같은데
당신이라는 문제를 다시 읽기 시작한다 길고 햇갈리는 지문 긴 지문을 읽다가 그만 당신을 놓치고 만다 왜 이 어려운 문제를 읽기 시작했을까 갸우뚱 갸우뚱 고개를 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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