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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학주 시인 / 낙과의 꼭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6.
황학주 시인 / 낙과의 꼭지

황학주 시인 / 낙과의 꼭지

 

 

흐린 날 개어귀에 햇살 비칠 때

박차를 가하던 필생이 툭, 떨어진다

단 한줄의 소리도 없다

 

결심을 해체한 순간의 육체

바닥까지 숙이고 남은 듯한

모과꼭지

 

바로 직전까지 쌓던 그 많은 열심은

마치 모과가 아니었다는 듯

꼭지는 마르고

 

흐린 날 개어귀에 평심의 햇살

그 무선(無線) 한줄은

더 이상 손볼 곳이 없다

 

태양풍 속으로 날아간 낙과의 중심

 

 


 

 

황학주 시인 / 강

 

 

말리지 말아요

똬리를 얹은 여자

물동이를 인 여자가

황금귀고리를 잘랑찰랑 흘리며

물살을 일으킨다

더 빠르게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가주세요

그것만이 삶이 된다면

 

 


 

 

황학주 시인 / 달

 

 

가족은 너 뿐이다

 

세상 뒤 항문 같은데 미끄러지다

 

안에서 다시 뜨는 몸

 

물빠진 하늘에서 너는 그렇게

 

손도 대지 않고

 

날 먹었다 뱉었다 하고 있구나

 

 


 

 

황학주 시인 / 개수

 

 

개수대 밑으로 떨어지는 일을

깊은 밤중 한 성자를 만나러 가기 위해

돌길을 굴러야 하는 것쯤으로 알자

 

누군가의 발밑으로 내려가는 영혼을

가장 안 닿는 구석의 눈물을 알고 있는

흐린 눈 가장자리 훑어주는 손쯤으로 생각하자

 

일생 동안 물 빠지는 소리를

당신에게 내려가 닿는 소리같이 들으며

 

잔뜩 쌓인 그릇들

오늘 안으로 닦아야 하는 냄새를 맡는다

소소한 슬픔들이 명절이 되는

주방에서의 찬송

 

 


 

 

황학주 시인 / 내가 어떻게 네게 왔다 가는가

 

 

비는 때마침 잘 오는 거 같아

잎사귀 안에서 연하게 바깥으로

빗소리들이

내 앞으로 몰려든다

 

함께 오는 것으로는 이명,

그 항로 없는 새들도 지저귀는 것으로는 얼마나 빡세겠어 아름답겠어

 

오늘도 제주도세요, 너는 묻지만

늦도록 책상다리를 하는 내 직업은

이삿짐 박스만한 말을 고층에서 조용히 내리는 것

 

그 길에 데리고 나온 인생은

지금 생각하니 그럴싸하고 찬란한 감정이었다

빗방울, 세간엔 우리가 밤봇짐으로 가장 어울린다는 말도 있는걸

 

하루에 빗소리 한 줄을 받아쓰며 파이는

찬 오늘밤

내일 밤

너는 무얼 할까

내 나이쯤 되면 무얼 하고 있을까

어느 날 손등에 떨어진 촉농 머금은 입맞춤부터

파인 곳에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눈물까지를 애써 살고

큰 나무도 없어 눈 둘 데 없는 막연한 해변을 구르며

 

어느 빗방울에 하냥 빠진

밤의 바퀴처럼 떨어진 어처구니처럼

 

내가 어떻게 어린 네게 왔다 가는가 어떻게

이명 안에 일생 흔들린 짐수레 하나를 세워두고

그만 늦겠다고 하는가

 

먼저 자고 가는

이것을 춘몽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황학주 시인 / 슬럼프

 

 

근황을 묻는 장거리 전화가 왔다

나는 문을 열어두고 며칠 빗소리를 들었다 했다

 

비 그친 해안도로에 쪼그리고

거북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

그 이야기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볼만한 구경치고

고독이 이렇게도 느린

이 헤엄을 배우기란 쉽지 않다

 

땅거죽에 깔린 가슴으로

마음을 누르며

부글거리는 체온이 식지 않게

 

둥이 된 포물선 위에 별빛 반지라운

밤을 홀로 보낸다

 

이러면 귀갑(龜甲)까지 붉어오는

부끄러움이 이국(異國)을 이룰 때인데

눈을 내리깐자의 눈빛

 

발을 뒤로 저으며

가장 화가 나는 곳으로 가고 있는 근황을

어떻게 이야기하리

 

 


 

 

황학주 시인 / 여좌동 늙은 남자들은 벚꽃로에서

 

 

벚나무와 함께 할 수 있는 것

벚나무 그림자에 손끝을 적시거나

벚나무에 보험 든 날인 양

벚꽃로 모퉁이를 여유만만 도는 일

여좌동 벚나무 단풍 찍어 바르면

눈 질끈 감아버리는 일

일흔까지 세며 다리를 건너왔으나

되돌아갈 때는 일흔일곱까지 세며 가는

친구를 응원하는 일

 

길 끝에서 서로 보이지 않으면

이제 막걸리 집으로 가야지

 

물소리와 벚 이파리 함께 머리끈 묶고 있는 여좌천

(머리조심)이라고 쓰여 있는 벚나무 가지 아래를 바람이 지나간다

벚꽃로 산책이란 머리를 다치는 것

멈출 수 없는 일인 양

누가 또 다쳤다는 연락을 받는 것

 

간판 없는 동네 막걸리집

오후 네 시 늙은 남자들은 괜히 코가 찡해서

지난 봄 벚나무들의 무차별 복수극이 벌어진

여좌동 길목 평상에 둘러앉아 있다

 

벚꽃 필 때 여좌동 노인 여러 커플이 깨지고

소소하게 다친 사람은 더 많았다는

벚꽃로 치정사건

오늘은 모두들 잊고 막걸리를 마신다

내년 봄 또 당하고 싶은 마음들이 홀짝,

 

 


 

황학주 시인

1954년 광주에서 출생. 세종대·한양대 교육대학원 및 우석대 대학원 국문과(박사과정)를 졸업. 1987년 시집 『사람』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 『갈 수 없는 쓸쓸함』 『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루시』 『노랑꼬리 연』 등. 제3회 서정시학 작품상, 제1회 서울문학대상 수상. 시선집 <슬픔의 온도>, 시화집 <귀가> <두 사람의 집 짓는 희망>, 산문집 <땅의 연인들>, 장편소설에 <세 가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