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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변영희 시인 / 아름다운 광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5.
변영희 시인 / 아름다운 광고

변영희 시인 / 아름다운 광고

 

거미줄에 달라붙은

나비를 어루만지다

놀라운 정리 전문가를 만난다

유품 정리

고독사 특수청소

거미줄을 탄탄하게 받치며

날아드는 죽음을 바라보는 일

이별의 양태를 헤아리다

손가락을 턴다

꽃잎 같은 손가락 딱 열이라서 다행이다

사물들 위에 조용히 내료앉아

쉬고 있는 속눈썹을 거어 내는 일

눈썹 하나 들어 올리는 일이 하늘을

여는 일처럼 무겁다

죽은 자의 집 청소*는

흠칫흠칫 고요하다

처마 끝을 휘돌아가는 물받이처럼

*김완 著

-시집 『코르크 물고기』 포지션 詞林 2022

 

 


 

 

변영희 시인 / 에필로그

-(나를 아는 데 오래 걸렸다)

 

 

나는 형태가 뭉개진 열쇠다

 

교실 문을 열 수 없다는 이유로

나는 말랑한 샌드백이 되었다.

늙은 선생의 대머리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열쇠를 철길에 던져버린 상춘이는

조붓한 어깨로 말이 없고

나는 감춰진 선생의 울증을

단단한 대장(代杖)처럼 견뎌냈다

 

내게 열쇠를 맡긴 늙은 선생은

병증이 탄로나고 말았다

왜 네 맘대로 열쇠를 넘기냐

상한 선생의 울음 같은 말

누가 내게 열쇠를 맡기라 했느냐

소리 없이 뭉개진 열쇠의 말

 

몇 년을 훌쩍 달려온 친구가 말한다

 

교실을 버려

열쇠 따위 멀리 던져버려

주름진 네 배꼽에 섬세하게 새겨줄게

기억대리인처럼 요철을 되살리는 열쇠수리공

배꼽이 간지럽다 ᄉ과 ᄅ사이

 

나는 몹시 수상하다

머리칼이 다 사라진 선생이 어쩌자고 웃는다

 

-계간시 전문지 <포지션> 2017년 가을호

 

 


 

 

변영희 시인 / 현관 자물통을 바꾸고

 

​ 배고픈 사람 같아

 손가락 물고 자는 거

 자꾸 찍지 마

 공갈 젖꼭지 물고 잠든 아이 같잖아

 눈썹 같은 새가 떨고 있는 밤 구룡포 어느 해파랑길 제각 문고리에 몇 마리 게가 꿈틀거렸어 누가 걸어두고 갔는지 모를 녀석들 훨훨 사라졌을 테지 바람과 태양과 달빛을 타는 횡횡거사 짠맛 단맛 다 빠졌을 거야

 제각의 귀신들 얼쑤, 맛나다 춤을 추었을까 지푸라기에 묶여 대롱대롱 매달린 녀석들은 힘찼어 낡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할아버지에게 저건 무슨 뜻일까요 묻고픈데 눈 감고 구름을 만들고 계셔서 차마 마음을 열 수 없었어 닫힌 것 없는데 열 수도 없는

 그런데, 제각의 문은 왜 잠가두는 걸까 공갈 젖꼭지도 아니고

​​

-계간 『문예바다』 (2023년 여름호)

 

 


 

 

변영희 시인 / 위연이 춘희에게

 

 

일구팔삼 시월 간행된

중고 시집이 내게 날아온다

 

위연은 춘희에게

시간은 이미 더 높은 곳에서*를

선물했다

 

국사학과 3년 춘희

 

춘희는 스물셋일까

 

이름이 진하게 박힌 편지 봉투가

비닐을 떼어 내자 툭 떨어진다

학교로 날아오던 친구의 엽서처럼

 

새삼 시집을 뒤적이는 이유가 뭐냐는 듯

 

위연과 춘희를 상상하는 동안

시간은 더 높은 곳에서 다시 툭 떨어진다

사라진 편지지를 찾는 눈알도 툭, 툭

 

끝내 알 수 없는 달리기

빛나는 여의주를 물고

 

울퉁불퉁

낯선 시로 다가오는

위연과 춘희

 

*장영수 시집

 

 


 

 

변영희 시인 / 1976, 안드로메다는 아니고

 

 

 열네 살 아이를 기차에 태워 보내며 언니는 자꾸만 말한다 낯선 사람이 말 시키면 대답하지 마 같이 어디 가자고 하면 따라가지 마 친절한 사람은 더 위험해 신흥역*에서 내려야 해 졸면 안 돼

 

 대체 누가 데려가

 

 열차는 느리게 칙폭칙폭 물건 파는 사람이 오가고 사탕은 달콤한 빛깔이고 조치원에서 신흥역까지 침만 꿀꺽꿀꺽 졸지 말라는 말을 어겨도 신흥은 멀-다 객차가 왁자한 전라도 사투리로 바뀌자 눈을 부릅뜨고 창밖을 본다 스쳐가는 간이역을 읽고 또 읽고

 

 이렇게 째깐한 가스나를 혼자 보낸다냐

 

 구릿빛 여자의 혀 차는 소리에 잘못도 없이 얼굴 붉어지고 어, 천원역도 있네 동그랗게 눈을 빛내고 친절한 사람도 없이 흔들 위험한 사람도 없이 흔들 졸음에 겨운 눈 애써 빛내며 흔들 흉측한 얼룩도 없이 신흥역 까닭 없이 눈물이 솟는다

 

 나는 안전하다 언제나

 

 조치원을 떠나듯 여기에서 사라질 테다 기어이 살아나는 초록처럼 신흥역에 당도할 거야 아슬아슬한 생을 위하여 알록달록 추파춥스 깡통에 가득 담아 갈 테다 이제, 안드로메다로…

 

*폐역이 된 호남선 철도

 

 


 

 

변영희 시인 / 코르크 물고기

 

 

 책갈피를 기념품으로 샀어

 

 참나무 숲을 헤엄쳐 온 따뜻하고 말랑한 책갈피. 책 사이 물고기를 방생할 때마다

발가벗긴 참나무의 울음이 기어 다니지. 울음에 젖은 책은 혼곤해질 테고. 나의 눈은

조금 더 반짝일 거야. 벽암록 사이 물고기를 살게 해야지

 

 말씀의 빗방울이 우박처럼 따가워

 모자를 씌워줘 도토리 숲으로 보내줘

 

 꼬리를 잡고 속삭였어. 너무 멀리 왔구나. 어서 헤엄을 쳐. 꼬리 살짝 비틀어줄까.

도토리 강의실을 찾아 헤매는 꿈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야. 밤이 깊어지는데 물고

기가 타전할 문장을 기다려. 카보 다 로카* 바람 같은

 

*유라시아 대륙의 끝

 

 


 

 

변영희 시인 / 시금치는 컹컹

 

 

 시금치를 다 뽑았어요 시금치가 예뻐요 적당한 거리를 가진 시금치가 예뻐요 떡잎 달린 시금치 홀로 위엄 있는 시금치가 예뻐요 붉은 뿌리를 가진 시금치가 예뻐요 칼을 튕기지도 못하고 시금치는 순해요 뜨거운 물을 만나자마자 냉큼 자지러지는 시금치는 울어요 당신은 시금치를 만난 적 있나요 푸른 시금치 말예요 스피커에서 막 튀어나온 시금치랑 엉덩이를 흔들며 바다로 갈래요 뜨겁게 자지러지는 꿈을 꿀래요 풀을 뽑는다고 시금치를 모두 뽑은 날 시금치는 컹컹 짖어요 내 말 보여요? 시금치는 사라지지 않아요 하늘 아래 시금치 당신 집은 어디예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오늘, 우리 어디로 갈까요?

 

 


 

변영희 시인

1963년 전남 장성 출생.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수학. 방송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졸업. 2010년 《시에》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 『y의 진술』 『코르크 물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