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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규미 시인 / 세한도를 찾아서 돌담을 돌아 나온 그림자를 따라갔다 제 숨을 끌어내려 발등을 덮은 이가 삿갓 쓴 옛시인처럼 마중을 나왔다
으스름 벽면에 그림 한 폭 걸려 있는 이상한 향기가 나는 오래된 방이었다 벽에 건 도포자락이 스스로 단정했다
다관에 물이 끓고 처마에 눈꽃이 이는 나지막한 풍경 하나가 어른어른 비쳤다 무가의 한 대목처럼 느닷없는 곡조였다
펄펄펄 소문 속에 다디단 눈이 쌓이고 바람은 적소의 꿈을 어딘가로 데려갔다
떠돌이 객승처럼 나는, 흰 벽사(辟邪)의 꿈을 꿨다 -시조집 『누가 나를 놓쳤을까」(도서출판 가히, 2025)
권규미 시인 / 모란이 왔다
그이는 곡비였다 늘 환생을 소원했다 시나브로 발이 젖는 해사한 그믐으로 잔잔히 면벽을 두른 노랑무늬영원, 처럼 찢어버릴 시간과 꿰매야 할 시간들을 아득한 전생부터 알고 있는 바람처럼 한 촉의 심장을 지핀 델포이 무녀였다 척애를 새기듯이 획을 치는 빗자루별 허공이 제 몸 그어 밝혀 든 生이듯이 다복솔 어둠이 외려 생생한 부표였다
-중앙 시조 백일장-5월 수상작
권규미 시인 / 화양연화(花華年華)
날 선 볏잎들이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부드러운 제 생각의 깊이를 이루는 동안 어린 나는 산그늘에 누운 바위 할멈에게 책을 읽어 주곤 했네 천연스런 그는 주름진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고 외로운 내 독서를 마른 호수에 드는 물길같이 잘도 받아마시었는데 그 천연스러움이 부러워 킁킁 더운 김을 부리며 엉덩이를 문지르는 늙은 암소를 바위도 나도 서로 웃고만 있을 때 산그늘 크단 입속에 골짜기 통째 잠겨버리고 심술로 뒤뚱거리는 소를 따라 우쭐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저녁들이 있었네 그 간절하고 나지막한 시간의 잎새들이 어스름 깃드는 저녁마다 별처럼 돋아나네 가뭄과 홍수와 햇빛과 바람 속에 그 무심하던 할멈 여전하신지 산그늘 당겼다 놓고 당겼다 놓으며 슬하에 곤줄박이 몇이라도 거두었는지 이슬의 행간을 빌려 편지를 쓰고 싶네 요새는 늙은 책이 나를 읽는 중이라고 쓸쓸한 소식 전하고 싶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
권규미 시인 / 연륜
나무의 나이테 그것도 알고 보면
사람의 눈물이 돌아나간 통로에요
절망에 절망을 덧댄
바람의 노래처럼
너무 늦게 피어난 11월의 꽃을 봐요
장미라는 그 이름 깜박 잊고 싶어지는
아직도 붉은 심장이
잘못 온 택배 같죠
-《성파시조문학》 2024년 제2호
권규미 시인 / 희고 맑은 물소리의 뼈 시간의 젖은 발들을 불러 북두의 별이 뜬 제 심연을 보여주는 소리의 뼈들, 희고 맑다
천 년 녹음 두른 묵묵한 관음의 화신, 말에도 뼈가 있고 바람에도 뼈가 있으니 무릇 생명의 으뜸은 뼈대라고 서둘러 일필휘지
어디서 굴러온 지 모르는 개뼈다귀 같은 생, 가망 없는 은총 속에 스스로 내몰린 듯 남루를 거울삼은 눈부신 저녁이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말, 외로운 시인의 강짜라 여겼더니 부끄러워라 저 무량한 빛의 하염없는 하강을 쓸쓸히 베끼는 물소리 적막하다
팔만 사천 꽃잎의 이마들이 동동동 희고 맑은, 새들도 쉬어 넘는다는 새재에 와서 제 몸속에 차곡차곡 뼈를 쌓는 어리디 어린 물소리를 본다
권규미 시인 / 찬란
시골 촌부로 가만히 살고 싶었다고 눈물짓는 빅토리아 여왕을 보면서
도무지 환상이 없는 동화처럼 아팠다
나는, 풀과 나무와 벌레 곁에 엎드려 이슬과 돌멩이처럼 평생을 살았는데
물속의 물방울 같은 이 삶을 꿈꾸다니
햇빛 속에 반짝이는 거미들을 보며 누구에게는 제집 마당 오가는 일이
또 한 벌 운명이라고 벗어날 수 없다고
꽃에게도 배우고 나무에도 배웠다 그래도 나는 밤마다 신데렐라가 되어
여기가 아닌 저기의 찬란이 날마다 부러웠다
권규미 시인 / 확률적으로 나는
나비가 나빌 확률 누가 봐도 백 프로니
꽃 또한 꽃일 확률 눈 감아도 자명하다
만물이 다 그일 확률은 진언처럼 단단한데
나는 지금 내게 몇 프로의 확률일까
시나브로 완연한 시간 속 잎새들을
모았다 흩었다 하는 나는 정말 누구일까
권규미 시인 / 때죽나무 아래
때 거르면 죽는다고 때죽꽃이 피었다는
누군가의 시를 읽고, 참 시인들이란 어디든 찰떡 콩떡을 갖다 붙이기도 잘하지
나비의 날개 위에 코끼리를 붙여두는
대책없는 아나키스트, 그 황홀한 무르팍에 희디흰 밥그릇 들고 다가앉는 울음처럼
어느 봄 때죽나무 아래 앉아보고 알았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때는 잊지 말란 말이 허공을 총총히 딛고 꽃차례로 온다는 걸
권규미 시인 / 시작詩作
아지랑이 멀미하듯 구토를 하곤 했다 한순간 벼락 맞은 듯 산산조각 나곤 하는 그 한 잎 생각의 마디가 그믐처럼 구를 때
파도와 다른 파도가 서로 만난 것처럼 길과 길이 얽혀버린 빗속의 교차로처럼 펄펄펄 끓는 강물에 발 담근 나무가 되어
속이 텅텅 울리는 양철 인형 꿈을 꾸며 나는 누구일까 여기는 또 어디일까 팽팽한 줄을 타듯이 바람과 난 한편이네
-시집 『누가 나를 놓쳤을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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