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순 시인(안성) / 청설(淸雪) -지난 날의 분하였거나 수치스러웠던 일을 깨끗이 씻어 버림
작은 마을에서 같은 열정으로 만난다는 건 위험해
우린 손톱에 물들인 봉숭아꽃물 손톱 끝에 아주 조금 남아 있는 그만큼만 닮았지
그래서 날마다 손톱이 자라지
당신은 참 전문적이야 가지런히 다듬어진 일곱 개의 손가락
영향권은 잘라내야 하는 걸까 더 길게 자라나 부러질 때 덧나는 걸까
더 나은 내일 더 나은 명성
하나가 될 수 없어 손톱 끝이 갈라지지
정도의 차이를 두고 나란히 곁을 두고
등을 돌릴만큼 멀지 않게 침묵의 이유가 되지 않을 만큼 가깝게
우린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만 닮아서 얼굴 마주하며 얼비친 그림자 흘릴 뿐인데
손가락 사이로 몰래 보던 반쪽 얼굴 말고 말갛게 헹군 눈빛.
박경순 시인(안성) / 갈잎
두 바퀴 페달이
젖은 낙엽 위를 궁글린다
사시가 된 눈동자 살 부러진 우산을 그린다
계절은 번개처럼 스쳐가는 국지성 소나기
같은 우산을 두 번 펼 수 없다
어제는 무거운 졸음을 보았고 먼저 지나간 바람 가던 길에서 되돌아 나오려는데
달달함을 삼키고 늦가을이 거리를 점거한다
갈변하는 혀 겹겹이 포개져
한 곳에 모였다가 뭉개지는 천 만 개의 발걸음
한 잎 한 잎 한 숨 어룽거리며 하냥 길과 길을 덮어 버려
어깨로 흘러내리는 잠을 낙엽으로 덮어 줄 수 있을까
언젠가 훔치려다 만 햇살의 심장 줄기 세포
시몬, 너는 보았는가
박경순 시인(안성) / 침대의 습격
뇌출혈로 쓰러진 권 시인은 열 두개의 다리 건너에 있다 열두 대문이라면 얼마나 걸음이 휘청거렸을까 그래도 다리 난간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호흡조절도 하고 보폭도 좁혀 걷는다
굴곡을 넘나들기까지 얼마나 깊은 인연의 가닥들이 눈물바람 속에 흩어졌을까 제 몸에서 뽑아낸 줄에 매달려 사는 거미는 그 줄이 끊기면 공중도 잃게 된다지 목숨을 이어줄 계기판의 숫자를 읽는 눈초리가 곡예를 보듯 호흡을 멈추게 한다
낮과 밤의 경계가 풀어진 침대 선잠의 여백은 습관적으로 눈꺼풀을 지운다 남은 시간 잘살아야겠다는 신음소리가 잘 죽어야겠다는 탄식으로 들린다. 자리보존하고 누운 머리 맡으로 한기가 엄습해온다
박경순 시인(안성) / 낡은 양말
지금도 낡은 양말이 남아 있다니
구멍 난 양말 알전구를 넣어 짜깁기해서 신었던 유년의 한때 지금도 양말은 따로 바닥을 비벼야 때가 빠지는 거추장스러운 빨랫감
지친 발을 보호해 주는 더없이 고마운 물건인데 남 앞에 내보이는 걸 부끄러워하네요 그런 양말을 잘 위로해 주는 우리가 될 수 없을까
양말에 까다로운 남편 양말 알아서 챙기라고 한 번도 사 준 적 없는데
비 내리는 날 짙은 냄새 베고 누워 서로 걸어온 먼 외곽을 생각하며 덤에 덤을 얹었다고 낡은 양말처럼 툭툭 털고 아무 데서나 스르르 잠들 수 있다면
박경순 시인(안성) / 고봉밥 이야기
가을걷이 잘 끝낸 들녘 이랑에 놓아둔 황금 볏가리들 한 손 말고 두 손안에 담긴 우리 마을의 따순 마음들 땡볕이 익힌 인심 사람의 온기가 벌판에 가득한 날 너도나도 파먹어도 줄지 않는 침이 섞여도 달디 달은 같이 먹는 고봉밥 그저, 꿀꺽 삼키고 소화 시키려고 뿜어낸 시민이라는 소화액을 곁들인 어느 때보다 절실한 한솥밥 그 밑에 구수한 누룽지 비워내도 바닥까지 구수하다고 한통속에 닿았다고 숭늉 한 사발, 그렇게 입가심하며 이리저리 지면을 넘기다 보면 이웃이 된 우리네 이야기들 밥 짓는 연기 피워 올리는 마음으로 한 상 가득 너를 초대할게 넘치도록 담은 뜨신 밥에 소박한 찬이지만 우리 같이 나눠 먹자 어서 와, 친구
박경순 시인(안성) / 피아노 -노영심-
그녀를 따라 시냇가로 갔지 작은 돌들의 악보로 연주되는 물소리
방금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들이 얼굴을 부비며 마가렛을 닮았다고 속삭이더군
누군가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킬 독한 자극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마음속에 자리잡은 질투가 화신처럼 피워올린 꽃이 아니겠냐구
시내라고 만만히 볼 일이 아니라서 어떤 여울목에서는 격정으로 튀어오르는 눈맑은 송어들
제 이름으로 놓은 징검다리로 한 발짝 두 발짝 그 돌들과 교감하고
엷은 안개와 수초로 깊어진 밤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오슬로의 아침을 맞이하라고 기어이 내 얼굴 냇물로 말갛게 씻기더군.
*오슬로의 아침; 노영심이 작곡한 피아노곡
박경순 시인(안성) / 경순 양이 채송화 양에게
세밀화 그리기에 당신만 한 모델이 있을까
키 작은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어진다 가장 낮은 자세로 앉아 눈 맞추면 어린 날의 경순 양과 만나게 된다
마당 한 켠 무릎이 으깨져도 널 보며 일어났다
대담하지 못한 것도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하고 싶을 때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오라고 속삭이는 것도
나를 닮았다
그땐 네가 핀 땅이 척박한 줄 몰랐다
공중을 넓게 볼 수 있었던 건 너의 낮은 자세 덕분이었을 것이다 너를 낮춰 주위를 환하게 보여주는 타고난 품성
화려한 꽃들이 넘쳐날수록 꼭꼭 숨은 널 찾는다
감정선이 여릴수록 지워지지 않는 의미로 남은 법
다변하는 세태 속에 예전을 그리는 건 변하는 것 속에 변하지 말아야 할 것 쇠비름처럼 붙들고 싶은,
아득한 날의 호주머니에 담긴 경순 양 때문이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황진성 시인 / 나의 타지마할 외 5편 (0) | 2025.12.19 |
|---|---|
| 강서연 시인 / 비상을 꿈꾸다 외 6편 (0) | 2025.12.19 |
| 김정인 시인 / 인간은 왜 외로운가 외 6편 (0) | 2025.12.19 |
| 이우성 시인 / 구름 일기 외 6편 (0) | 2025.12.19 |
| 안효희 시인 / 완벽한 시인 외 6편 (0) | 2025.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