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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연 시인 / 비상을 꿈꾸다
걸핏하면 한쪽 팔이 빠진다 남은 팔로는 새무리를 따라갈 수 없어서 놓친 행방을 뼈에 새긴 나는 살아갈수록 무례한 짐승이다 일찍이 타고난 보폭보다 더 넓은 걸음을 비상이라 했던가
새로 입주한 고층 새장은 날이 갈수록 진화를 거듭해 리모컨 하나로 직립과 고립을 거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전의 생은 모두 하찮은 것인가
짐승은 제 몸뚱이 구석구석 털을 기르는 주인일 뿐 다행히 피가 묽어서 아무 곳이나 찌르면 꽃이 핀다
공중의 처소들이 미분양된 동절기 바닥에 쌓인 처방전은 둥지의 흔들리는 문패다 알약이 몸 안으로 들어가면 초인종처럼 벨이 울리고
늦가을 길을 걷다가 낙엽 하나 들어 올리는 것도 날개를 다는 일인데
팔과 날개를 바꿀 때 잃어버린 나사를 찾을 수 있을까?
-시집 『가로수 마네킹』에서
강서연 시인 / 구멍들
알밤을 깨물다가 아뿔사, 벌레를 씹었다 밤이 품어 키운 유순한 회오리 딱, 끊어지면서 오히려 환하다 반 토막 난 몸뚱이가 입안에서 꿈틀 이 느닷없는 살생을 뱉을 것인가 어쩔 것인가 왜 하필이면 저 깊은 어둠 속에 나사를 조여 놓았을까 그렇지 밤꽃이 열리는 통로일지도 몰라 단단하게 조이지 않으면 수시로 꽃내가 흘러나와 청설모도 다람쥐도 축축이 젖어 밤잠을 설칠지도 몰라 동녘을 야무지게 조여야 아침이 오고 가을이 느슨하게 헐거워져야 황급히 첫눈이 내리듯 구멍이란 본디 들끓어 넘치는 것이어서 내가 처음 세상에 나오던 그곳도 사시사철 밤꽃이 만개했었지
낮술에 벌겋게 달아오른 중년 남자가 꿈틀꿈틀 지하방으로 나사를 조이고 있다 움츠리고 앉아서 하나에 오십원짜리 라이터돌을 박던 여자의 몸에도 곧 밤꽃이 만개하겠다
강서연 시인 / 자전거는 두 바퀴로 풍경을 본다
그러나 누가 벚나무의 질주를 주동했을까 지난밤 위험한 문장의 받침처럼 빠져나간 자전거 바퀴 그것은 자전거의 사소한 불행일 뿐 벚나무 가랑이 사이에 바퀴를 굴려 어디까지 갔다 왔을까 저에게도 고립을 버리고 떠나고 싶은 날들이 왜 없었겠는가 곡성역 광장에는 노란 잎 택시들이 웅성거린다
새로 보수한 보도블록 밑에는 갈증의 헤게모니들 지상의 가지마다 이산의 족보가 낡음낡음하다 끝없이 나이테를 굴려도 닿을 수 없는 곳 내리막길에 슬며시 손을 놓은 핸들이 그렇고 밤낮없이 돌아가는 하늘의 CCTV가 그런 것인데 하물며 뜨거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택시 기사들이 장난삼아 신겨준 둥근 신발 한 짝 나무들이 다녀온 그곳으로 떠나기 위해 지구 밖을 막 벗어나려는 순간, 하찮아도 사랑이다
강서연 시인 / 둥지
거실 소파가 서식지였던 남편은 어느 날 홀연히 베란다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세월이 뒤따라갔지만 그가 날아간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창문은 늘 열려 있었고
약병은 번번이 쓰러졌다 슬어놓은 아이들은 나무 그림자가 안고 품어서 그런지 쉽게 휘어지는 날개를 지녔다 아이들은 숟가락을 허공에 찔러놓고 자주 뒤꿈치를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깃을 세워 스스로 털을 밀어내며 사춘기를 견뎠다 얘들아, 하늘을 보렴 새를 놓친 것은 너희들 잘못이 아니란다
나뭇가지도 함부로 세를 놓지 않는 계절 미루나무 그림자가 둥지를 들고 들어와 소파에 오래 놀다 가는 날이면 철새 한 마리 베란다 주위를 돌고, 돌고, 돌다 갔다 곧 겨울이 올 것 같다
-시집 『가로수 마네킹』에서
강서연 시인 / 풋사과 바이러스
태풍 너구리는 소용돌이 탯줄을 끊고 태어났다 피 묻은 바람이 안고 품어서 그런지 번뜩이는 맹수의 눈을 닮았다 컴퓨터로 복제한 유모의 젖이 늘 모자란 탓에 우렛소리 빗소리 번갈아 꽂은 막대과자를 물고 자랐다 허기진 궁리는 죄처럼 깊어져 하늘에 붙은 알사탕 하나 삼켰을 뿐인데 물먹은 길들이 흙의 매듭을 풀고 달아나는 것이다 닻을 내리고 항해 중인 도시의 옥상들 침몰과 아멘의 속도를 믿는 십자가는 완고하다
야생의 이빨에 발뒤꿈치 물린 가로수들 자지러진다 까르륵 흔들리는 것이 저리 신나는 일인지 나조차 내 맘대로 펼치지 못한 돛이 있다 늑골을 딛고 자란 한 그루 사과나무 도저하게 매달린 쓴 열매는 삶의 바이러스였다 살아있다와 살아간다의 차이를 오가던 암센터 복도에서 투명한 면벽에 들었던 적도 있다 너구리 우리에 갇혀 허공을 할퀴는 수상한 빗금 저것은 혼자 외로운 너구리의 모국어다 사이버 공간으로 굴러 떨어진 풋사과의 통증 낙과의 필사적인 방향으로 혀가 휜다
빛을 갉아먹는 서쪽은 흔들림을 기억하는 맛의 취향 너구리 모피를 두른 바람은 속보의 덫을 찢고 달아났다 푸른 눈동자를 잃어버린 사과나무에게 아삭, 저녁이 옮긴 귓속말은 위험하다 과수원 밖에는 돌아온 노아의 방주 녹슬어가는 갑판 밑이 유난히 소란스럽다 손가락을 물고 놓지 않는 누군가 벌레 먹은 사과에 더블클릭을 시도하자 죽은 사과나무가 다시 부팅되기 시작한다
-『시산맥』 2016. 여름호
<동요> 강서연 시인 / 똥 밟았다!
교회에서 한영이가 똥 밟았다! 길고양이들과 함께 사니 할 수 없는 일이다.
옆 집사는 친구가 똥 밟았다! 개와 함께 사니 할 수 없는 일이다.
동물과 함께 어울리면 생겨나는 일이다. 보통은 재수가 없다하지만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일. 그 이유는 추동처럼 도시는 동물과 함께 어울려 살지 않기 때문이다.
강서연 시인 / 벌레집에 세 들다
백아산 골짜기 송이버섯 같은 집 한 채 갓 지붕 너머 낮달에서는 짙은 놋그릇 냄새 녹음이 벽지를 겹쳐 바른 이곳이 애초 벌레들의 집이었다니 그들은 날개가 있고 나는 없으니 그들에게 있는 것이 내게는 없었으니 무엇을 담보로 한 계절 묵어갈까 궁리하고 있는데 도랑물 수시로 쌀 씻어 안치는 소리에 문득 내가 당신을 이토록 사랑했었다니,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파온다
초저녁 비는 자귀꽃잎 사이사이를 적시고 벌레 먹은 배춧잎에 쌀밥 얹고 된장 한 숟갈 얹으면 그러니까 내가 사랑했던 당신을 데리고 붉은 지네 한 마리 기어 나온다 누가 이 늦은 밤에 싸릿대 질끈 묶어 마당을 쓰는가 잊어야산다 잊어야산다 뻐꾸기도 잠든 밤
주민세와 인터넷 사용료는 내가 낼 테니 전기세는 반딧불이와 정산하시게나 흙 속 어디에 길이 있어 마당을 저리 촘촘 가로지르는지 재산세는 망초바랭이명아주쇠뜨기괴싱아 푸른 잎으로 받으시고 그도 저도 난감하면 이장님 같은 산 그림자에 물리시게 소득세니 물세는 저 들이 알아서 내지 않겠는가 주세도 내가 낼 테니 이리 와서 술이나 한 잔 받으시게 밤마다 날은 새고, 청개구리들 빈 신발 떠메고 어디까지 가려는지
우리 수일 밤을 그리 동침했으니 도란도란 슬어놓은 알들이 깨어 날 찾거든 칠월 한낮 우주의 가마솥이 펄펄 끓어 넘쳐서 이번 생은 그냥 지나가는 길이니 애써 설명할 필요 없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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