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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시인 / 그 달을 훔쳐 보다
'중천에 째지게 걸린 시뻘건 둥근 달' 시인의 어머니를 불러온 달, 그 달이 궁금해 천체망원경을 샀다
망원경에 비친 둥근 달은 황금빛으로 이글거리며 사십육억 년 세월에 생채기를 내고 여기저기 움푹 패인 고단한 달을 훔쳐봤다
-시집 <그 달을 훔쳐 보다>에서
강나루 시인 / 감자가 눈을 뜰 때
베란다에 둔 감자 종자에서 눈이 트였다 마대 속은 어두운데 하늘을 보려고 옆구리에서 항문에서, 온몸에서 빛이 틔어 마대 속 하늘이 환해졌다 본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일 마대 속에서 답답해 하면서 하늘을 열고 빛을 쏟아낸다 눈은 한결같이 하늘을 향하고 한철동안 빛을 보지 못한 씨감자는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온몸이 파랗다 하늘을 본다는 것은 독기를 품는 일, 푸른 독기를 품는 일은 빛을 보는 일 어둠 속에서 겨우 숨 쉬는 것들은 멍이 들도록 빛의 출구를 찾을 것 나는 마대 속 같은 방 안에서 온몸에 멍이 들도록 몸부림쳤다 마침내 푸른 하늘을 닮아 멍이 든 영혼이 눈을 뜬다 눈에 멍이 든 사람을 보면 반갑다 하늘에 부딪혀 하늘을 닮아서 멍을 뚫고 하늘이 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은 푸르고 멍든 사람은 빛이 되어 줄래줄래 줄기를 뻗으며 빛을 향해 포복한다 세상의 모든 멍든 눈들이 아프게 길을 간다.
강나루 시인 /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기도할 때
설을 앞두고 우리 일가 모여 생전의 할아버지가 쓰던 작은 탁자 위에 낡고 글씨가 굵은 성경 한 권 그 위에 모두 손을 얹고 설날 상주였던 아버지가 기도를 하는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왜 착하게 사셨어요, 나는 착하게 살지 않을 거예요 왜 이까짓 성경책만 읽었어요, 나는 성경을 읽지 않겠어요 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가 착하게 살며 성경을 읽는 동안 세상은 착해지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학동 아파트 철거 붕괴사고가 터지고, 화정동 아파트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내가 거짓으로 살아가도, 성경을 읽지 않아도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가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상 내일모레는 민족의 대명절이라며 가난하고 착한 사람들은 남광주시장에 북적거리는데 오늘 밤, 할아버지의 낡은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기도하는 동안 아버지는, 열다섯 살 때 만주 벽돌공장을 돌아 6·25한국전쟁의 한복판을 지나 겨우 성경 한 권을 남긴 남루한 할아버지의 일생을 눈 지그시 감고 기도한다.
-시집 『감자가 눈을 뜰 때』에서
강나루 시인 / 새싹비
봄을 알리는 비가 내린다
산과 계곡과 강가의 마른 풀들이 빗방울 흠뻑 머금은 채 온 힘을 다해 대지를 촉촉이 적신다
이 비 지나고 나면 땅과 하늘이 요동치며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던 틈바구니에서 봄을 화려하게 장식할 생명의 푸른 피가 넘실거릴 것이다
강나루 시인 / 너를 기다리는 시간
가을을 놓치고 간 동강의 굽이치는 능선 자락이 얼마 전 재 입대 한다고 찾아온 삭발한 청년의 짧은 머리카락처럼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잎새는 지고 없다 나뭇가지마다 붉게 시린 눈망울이 허전한 강물 너머를 응시하고
노을만 바라보던 초저녁 달은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느냐"고 안부를 물어온다
너를 기다린 시간이 저물고 있다
강나루 시인 / 생명을 짓다
헐거나 찢어지면 함부로 버리는 풍요로운 시대에 할머니는 우리들의 그것들을 바늘로 꿰맸다 침침한 눈으로 바늘귀에 실을 넣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할머니는 바늘귀에 실을 잘 넣곤 했다 그 신통방통한 재주는 귀가 어두워 잘 듣지 못하지만 우리들 입 모양만 보아도 알아듣는 비밀 같은 것,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벙어리 바늘에 실을 꿰어 마침내 실과 바늘을 완성하여 낡거나 찢어진 옷을 꿰매 새것으로 짓는 할머니는 바늘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는 마술사 그러하니 세상의 말들을 귀신같이 알아듣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동시> 강나루 시인 / 애호박, 늙은 호박
참 우습지
호박더러 사람처럼 '애,' '늙은이'라고 하는 말
그 말도 맞겠다
내 동생처럼 말랑말랑하기 때문에 애호박, 우리 할머니처럼 쭈글쭈글하기 때문에 늙은 호박
그래도 그 말 참 우습지.
강나루 시인 / 겨울 시금치 밭에서
우리 삼대 남의 집 문간에 살 때 할머니는 옥상에 시금치 씨앗을 뿌리셨다 가족들 모두 난로가에 모여 불을 쬘 때면 하늘길 숨차게 내려온 겨울 바람에게 연신 싸대기를 맞으면서도 피학증 환자처럼 그것을 즐기는, 거적대기 하나 없는 옥상의 시금치는 그 때마다 엔드로핀이 솟아 뿌리에서 줄기, 줄기에서 잎사귀 구석구석에 뜨거운 단맛을 머금었다 할머니는 마당귀에 겨울 시금치 씨앗을 뿌리신다 작은아버지와 고모가 쓰거운 겨울 바람에 길 꺾어졌지만 우리들은 승냥이처럼 들판을 쏘다니며 시금치처럼 가슴에 푸른 멍을 키운다 여름날 무더위에 얻어맞은 상처들이 단맛이 되는 사탕수수처럼 쓴 겨울을 견딘 시금치가 단맛을 만드는 역설, 겨울 노지에서 자란 시금치가 왜 단맛이 나는지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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