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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계헌 시인 / 노시인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0.
송계헌 시인 / 노시인

 송계헌 시인 / 노시인

 

 

땅을 파는 일이나 시를 파는 일

시를 짓는 일이나 죄를 짓는 일

우리들 맨살 가슴 들고 나는 바람

허허로운 이랑을 안고 꿈결 외로운 눈썹으로

한포기 예지를 떠올릴 때

가는 피 댓줄로 감겨오는 스산한 세상

자주 빛 눌라움 맑은 죄같은 늘

작은 모래 무덤속에 있었네

 

 


 

 

송계헌 시인 / 제야의 촛불 아래에서

 

 

새해에는 주여!

여기 하늘 한 페이지 쓰다만 쓰디쓴 구절을

무화과 향기로 거두게 하소서

가슴마다 좋은 말의 씨앗들 배게 하시어

연한 풀잎 위 이슬로 서게 하소서

 

새해에는 주여!

배고픈 노인이 추운 밤 군밤을 팔지 않아도

하늘꽃처럼 모여드는 허락하소서

몰래몰래 믿을 수 있는 밥상을 차려놓고

한 수저마다 떠오르는 걱정과 탄식을

천천히 천천히 쏟아 붓게 하소서

 

새해에는 주여!

감람나무 새순이 함부로 자라지 않도록

진실의 새를 가두고

교만할 때 조금씩 잘라낼 수 있는

톱질을 허락 하소서

죄의 부스럼 톡톡 불거진

주홍빛 문설주를 부여잡고

딴 길로 헤매는 상처난 발자국을

한찬 울게 하소서

 

그러나 주여!

새해에는 새해에는

지문까지 드러나는 환한 종소리

신령의 종소리 울리거든

이 지구 밖에서 소멸된 빛 들 다 데리고

영원을 품은 순간의 이름으로

모든 절망 뒤세우소서

모든 소망 앞세우소서

늘어나는 돌계단 마다

꿈의 밀떡과 포도주를

가득 부어지게 하소서

 

 


 

 

송계헌 시인 / 純銀의 아침에

 

 

빛과 소금으로 영글었습니다

진리의 날개를 펼쳐 들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황무지에서 일궈낸 금빛 씨앗

머리 채긴 바람을 맞고 서 있는 투명한 나뭇가지

한 줌 소금같은 기도로 죄의 옷자락 정해지기까지

길 끝에 주저앉은 영혼들 무릎 세워 일어설 때까지

안으로만 울부짖는 작은 돌멩이

 

이 아침 나는 가녀린 새의 맥박으로 천년을 노래하렵니다

바람의 이마를 가르는 빗방울 첫 악보를 연주하렵니다

손을 씻고 맞이하는 조촐한 식탁에 새하얀 백합을 꽂고

이 세상을 맨 처음 만나는 아이들의 순결한 노래에 귀 기울이렵니다

 

이 아침 주님이시여

무딘 발길이 새벽 숲길을 헤치며 갈 때에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어둠 속에서 이제 마악 펼쳐 든 날개가 꺾이지 않게 하소서

 

좁은문의 손잡이는 늘 푸르고 반짝입니다

 

내가 저지른 과오와 욕망의 뼈 사이 진실의 새를 가두고

겨울 얼음장 아래서 뽑아 쓰는 결빙의 언어를 만나게 하소서

맨 처음의 성소에 불을 밝히고

영혼을 품은 신령한 종소리 울려 퍼질 때에

우리의 펜대가 쓰디 쓴 수액에서 뽑아 올린 무화과 향기로 번지게 하소서

가시밭길 사이 옳은 길을 향해 내딛는 첫발자국 되게 하소서

 

 


 

 

송계헌 시인 / 푸른 샘물 어리는 회색 담을 끼고

 

 

저기 환한 슬픔 담회색 샘물 고여 있는 골목길

 

고향이 깊어지네

아무도 들르지 않는 그 길

어머니 자궁의 느낌으로 구불텅 자매들 어린 기억을 꾸깃꾸깃 감으면서 푸른 샘물 자아내는

동네동네를 실어 나르던 시간의 호흡이여

 

아무런 색깔도 걸치지않은 어린아이들처럼

가끔씩 옹알거리며 촉촉한 부드러움까지

이끼와 작은 벌레의 향기로운 숨소리에 취하던 막다른 그 길

 

오직 빈자리가 끌고 가는 것은 아버지 녹슨 트럭의 후전등

어둠이 어둠을 밝혀주는, 안간힘이 안스러움을 더하는 울음주머니처럼

어떤 근원에 도달하려는 걸까

절벽보다는 훨씬 더 굽은 곡선의 가능성이 짙어서 그 길 붉은 노을로 잠겼을까요

 

이제 육순 칠순의 나이 들어찬 첫째 넷째 다섯 여섯...

더러는 죽고 몇 안되는 씨앗처럼 살아남은 우리 자매들

비스듬히 기대어 점점 둥글어지는 담회색 골목을 휘돌아 휘돌아도 닿을 수 없는

물의 입자들처럼 꽉 움켜쥔 그 길 고향길은

 

-<애지> 가을호에서

 

 


 

 

송계헌 시인 / 황사

 

 

첨탑을 지우고

들풀을 지우고

열에 들뜬 몸 휘돌아 휘돌아

고비나 타클라마칸 어디 쯤에

모래 언덕으로 늙어가기를

 

눈 감고 귀 막고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얼굴 깎이지 않는

서역 바람의 등뼈가 되기를

 

밤이면 검은 머리칼의 지평선에 머리를 뉘이고

숲과 강물 합장한 모래무덤을 품고 살겠네

 

불온한 봄날

아가미만 앙상하게 남겨

나무와 별과 신기루

항하사(恒河만큼의 쓰린 족적

 

백 개의 죄목

백 개의 인연 모두 끊어버리는

 

너의 기억체계는 늘 바람이었다

 

-《호서문학》 2018년 겨울

 

 


 

 

송계헌 시인 / 붉은 이마 짚어보는 동안

 

 

메타세콰이어, 플라타너스, 목백합

수많은 가로수의 이름들.

그 별같은 이름의 푸른 운하를 건너

나 오늘까지 아름답게 걸어왔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그렇게 오랜 햇빛이 강을 이루는 동안

나는 갓 태어난 아이들의 분홍빛 주름을 씻어주었고

가까이 혹은 먼 죽음들을 떠나보내야했다.

이 뿌리에서 저뿌리로

뒤척이며 그들 수액을 길어올리는 동안

비망록처럼 시인의 이름을 얻었고

삼십년 몸 담던 교직을 떠나왔다.

 

버즘나무, 은사시여, 층층나무여

수천의 매미 울음 업고

도망도 못가는 청상과부여

내 잠시 그대 붉어진 이마 짚어보는 동안

낯선 어느 집에선가 문패가 새로 걸리고

이끼 슬어놓은 골목마다

키 낮은 사랑들

피어나고 피어나고

 

 


 

송계헌 시인

대전에서 출생. 공주 교대, 한남대 사회문화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1989년도 《심상》誌로 등단. 시집 『모서리 슬픈 추억을 갖고 싶지 않다』 『붉다 앞에 서다』 『하루의 정전』 등. 제 9회 대전 시인 협회상 수상. 2020년 대전 문화재단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대전 충남 작가회, 심상 시인회 회원. <새여울> 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