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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노나 시인 / 느티나무 휴게소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0.
이노나 시인 / 느티나무 휴게소

이노나 시인 / 느티나무 휴게소

 

 

웅크리기 좋은 밤이야

걱정하지 않아 오늘도

느티나무 아래 그림자

 

앉는 자리가 늘 기우뚱한 나는

꼬리 잘린 긴꼬리원숭이

빨갛게 영근 흉터가 가려워

길 끝 느티나무엔 은밀한 자국이 동그랗지

한 계절이 끝나기 전에 벌써

다음 계절이어도 나는 아무렇지 않아

느티나무 밑동에 기대 나를 안으면 가만히 따뜻해져

동트기 전에는 마음껏 웅크려도 괜찮으니까

한 번에 하나씩만 실패할 수 있기를

바랄 수도 있겠다 싶었어

 

몹시 추웠던 어느 겨울 늦은 밤

새로운 가지를 내는 일만 남은 느티나무 그림자 아래

느티나무 휴게소 아줌마가 끓여낸 라면을 먹으며 생각해

다시 걸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노나 시인 / 봄을 끌어당기는 줄도 모르고

 

 

딱 멈춘 채였다 돌아보고자 했던 시도도

나아가려고 했던 기도도 무의미한 마음이었다

미리 알았다면 달라진 것이 있었을까

 

끌어안았던 얼굴들을 한 손에 쥐면 꽃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웅크렸던 시간을 죄라고 한다면

지금 창밖에 부는 바람을 덫이라 불러야 한다

 

해가 뜨고 진다

달이 따라 진다

 

달아나기 위해 불렀던 노래는 마디와 마디 사이 숨을 숨겨 놓았다

더러 결이기도 했다 선택을 해야 했다

 

젠가의 마지막 막대를 빼기 전

뒤집은 쓰레기통에서 쏟아진 어제의 기억

 

누구의 시간은 누구만의 것이어서 누구도 알지 못한다면 비겁이 될까

덮고 싶었다 다시 펼칠 것을 알면서도

달빛이 그렁그렁 옆으로 도망갔다

겨울은 끝나지 않겠다는 듯 온 거리의 나무를 흔들며 다녔다

 

꽃잎이 날렸다

 

끝내 봄을 끌어당기는 줄도 모르고 나는 애써

겨울로 도망가고 있었다

 

간 『시인수첩』 2023년 여름호 발표

 

 


 

 

이노나 시인 / 어딘가로 흘러가는 한 줄

 

 

하나의 줄로 구조된 바다.

 

그것은 너무 흔합니다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바닥을 친 손에서 새를 꺼냈다

 

(하품, 머리를 가로젓는)

 

나는 부랴부랴 새를 집어넣고 모자를 꺼내려다 슬그머니 넣었다

꺼내놓을 것이 없어서 속주머니와 소매 단을 한동안 뒤적였다

 

거기 그 마음은 어디다 쓸 거요

 

쓸 수 있는 마음 같은 건 이미 없었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고백이 튀어나왔다

 

잠깐 졸다 오면 안 될까요?

 

도통 나아지는 게 없네요

흔하지만 귀중한 것을 내놓으시면 됩니다

거기에 애달픈 사연 하나 버무리세요

이를테면 절망이라든가 공포라든가

 

나는 난감했다

이미 고백한 뒤였으므로

퍼 올릴 것이 없는 마른 우물우물우물이었다

 

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반드시 차오릅니다

 

아름다운 충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마침표를 지웠다

 

바다 혹은 구조 혹은 처음의 그 한 줄이 어딘가로 흘러갔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이노나 시인 / 영원한 사랑

 

 

베고니아꽃 화분을 선물로 받았다

현관 앞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탐스러운 꽃잎들이 즐거웠다

며칠 뒤

꽃은 앓기 시작했다

자리도 공기도 나의 손길도 싫었던가

꽃잎 가장자리부터 말라갔다

나도 어느샌가

저 꽃잎은 언제 떨어질까

기다리기 시작했다

툭툭

송이째 떨어지는 꽃잎을 수습하는 것이 아파

보지 않은 날도 있었다

 

징조는 잦은 오해를 불렀다

 

두어 송이 베고니아 꽃이 자그맣게 피어났다

 

 


 

 

이노나 시인 /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대부분 그러했다

의자가 삐걱대는 것은 불편한 시간 때문이며

먼지가 날리는 것은 지나간 마음 때문이라는

사소한 이유를 대며 이유 없이 끓어올랐다

가라앉지 않는 희망 따위들을 원망했다

비극이 창밖에서 휘파람 소리를 냈다

저 멀리 산등성이가

바아아아알갛게

물들고 있었다 혼돈이

해체되는

봄이 오는가 했다 며칠만 며칠만

모른 척 눈감으면 저 머얼리

산등성이는

꽃구름일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사람들은 저마다

겨울을 벗고 부푼 얼굴로 평안할 것이다

평안할 것이다

라는 거짓말처럼 어디서건 욕망과 오만이 무성했다

지난밤을 견딘 움들이 모른 체 자꾸 자랐다

어느 누구에게도 무해한 계절은 없었다

 

-문예지 <엄브렐라>(봄-여름호)

 

 


 

 

이노나 시인 / 잘못

 

 

견디는 날들이 많아질수록

잘못이 쌓였다

너무 많은 잘못이어서

무엇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머뭇거림이 잦아졌다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어떤 뒷걸음은 아주 강력해서

모든 것을 흡수하였다

그렇게 어두워졌고 깊어졌다

기대와 시간은 좌절과 공포로 태어나

꺾이지 않고 자랐다 여전히

믿음은 믿음의 형태로

약속은 약속의 형태로

존재는 힘이 없었다 오히려

대체로 무책임했다

두드러지는 것을 반성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 바람을 붙잡았다

쥐는 것은 잘못이었다

잘못이 생각없이 쌓이는 날은

오로지 견뎌야 했다

 

 


 

 

이노나 시인 / 요즘외출

 

 

 소리나지 않게 걸었다 복도는 조용했다 807호 문앞에 놓인 10킬로그램짜리 쌀이 며칠째 그대로다 승강기는 고장이었다 좁은 비상계단을 한 칸씩 내려설 때마다 터엉터엉 소리가 울렸다 비인 냉장고 냄새가 났다 우편함에 꽂힌 책의 표지는 계절마다 바뀌었는데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은 끊임없이 그를 살려 내는 일이었다 작은 글자였다 많은 이름들이 흘러갔지만 잡을 수 없었다 겨울이 쏟아졌고 텅 빈 문장들이 허물어졌다 바람이 불었다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내가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골목 끝에서 세 명의 여자가 큰 여행용가방을 끌며 다가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하나의 챕터가 끝나가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오른쪽 눈이었다 편의점이 자꾸 멀어졌다 드디어 배가 고프지 않게 되었다.

 

 


 

 

이노나 시인 / 하필 상관없는 금요일

 

 

 금요일이었어요 4번째인가요 5번째인가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겠죠 매번 잘못된 시간에 나타나는 내일이 있거든요

 

 사랑의 시간은 어디쯤 오고 있나요

 

 다만 그날이 하필 금요일이었고

 금요일이 주저하며 평화로울 때 나는

 자주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알 수 없어요

 

 기다리기 지쳤거나 잊었거나 멀리 돌아 끝나지 않는 금요일을 위해 작은 건배를 하겠죠

 

 매번 엇갈려 마주치지 않았던 데이지꽃은

 이제 시들었어요

 

 4시와 5시 사이 약간의 행운이 따르면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다리가 새롭게 뻗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면 나는 금요일의 꼭대기에 올라 저 멀리 느긋하고도 쓸쓸한 밤이 도착하는지 살펴볼 거랍니다 그것은 무해하여 건드리지 못할 것 같은 아침과 함께 오지만 만져본 적이 없는 까닭에 나는 애써 눈썹 위에 작은 차양을 만들고 찡그린 눈으로 어리둥절하거나 더디게 아무는 흉터를 긁으며 짜증을 내고 망설이겠죠 그래도

 

 하필 상관없는 금요일이라서 가벼운 마음이에요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이노나 시인

2012년 계간 《연인》으로 등단. 필명: 이자명. 2017년 격월간 〈K-스토리〉 소설 부문 등단. 시집 『마법 가게』 『골목 끝집』.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 아침문학 동인. 인간과문학파 회원. 현재 한국시인협회 《한국시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