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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진성 시인 / 나의 타지마할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9.
황진성 시인 / 나의 타지마할

황진성 시인 / 나의 타지마할

 

 

지독한 사랑이 그녀를 죽였다

 

샤자한의 둘째 왕비

정복욕 불타던 샤자한의 전쟁터에 동행하며

열네 번째 왕의 아이를 낳다 죽은

키 작고 얼굴도 예쁘지 않았는데

착한 성품이 사나운 왕의 마음 사로잡았다

 

십사 년 동안 뱃속 아이를 품고

전쟁터의 막사 속에서 사육된 암소

짐승 같은 생을 사랑으로 믿고 살다 간 여자

 

한 번의 포옹과 따뜻한 말 한마디에

그의 옆에 눕는다

나의 타지마할, 휘황찬란한 무덤을 적시며

독한 사랑의 비는 내린다

 

 


 

 

황진성 시인 / 영국사 은행나무

 

 

천 년을 건너온 한 노인이 있다

그 어떤 사랑이 천년을 견디게 했을까

그리움도 수위를 넘으면 노랗게 곪아 터지는지

세월이 다독여 이제 상처 아문 자리

덕지덕지 노란 딱지가 앉았는데

바람이 긴 혀로 환부를 핥으며 가고 있다

 

우수수 땅에 떨어지는 노란 피딱지

 

갑옷 노란 비늘 털어버리고

맨몸으로 젊은 노인 우뚝 선다

구멍 난 가슴에서 새로운 줄기 하나가

천태산 젖줄에 부리를 박는다.

이제 세 개의 다리로 튼튼하게 서서

새 천년쯤 더 견딜 수 있다고

 

옹이로 얼룩진 단단한 어깨 기대어 본다

 

-시집 <폼페이 여자>에서

 

 


 

 

황진성 시인 / 어떤 패러독스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

21세기 제논이 허공에 화살을 쏜다

화살은 그대를 향해 날아가다

담장 타고 오르는 들장미에 멈춘다

뾰족한 가시를 향해 돌진한 것이다

 

담장에 머리가 부딪쳐 추락하자

창과 방패를 든 아이가 얼른 줍는다

저는 양파예요 까도까도 허구인

어른들이 달려들어 빼앗아 간다

 

화살은 양파의 과녁에 눈이 어지러운지

서울역 뒷골목 노숙자에게 박힌다

역 앞에서 구걸하는 등 굽은 할머니

화살을 주워 전대에 꽂은 뒤

의기양양 할증택시를 타는 것이다

 

해외여행을 마친 맹인부부가 합승한다

역시 세상은 멀리 나가봐야

견문을 넓힐 수 있다며 화살을 산다

기원전 피타고라스를 향해 힘차게 쏜다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

뾰족한 과녁에 박혀 파르르 떨고 있다

 

*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제논의 역설

 

 


 

 

황진성 시인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신탄진, 매포, 전의, 서정리

KTX를 타고 다니며 잊었던 역 이름

모처럼 무궁화호를 타 보니

역마다 옆자리 승객이 술래처럼 바뀌네요

휙휙 스쳐 지나느라 놓쳤던

담배연기가 구름으로 피어오를 것 같은 신탄진역

청춘의 추억이 묻혀 있는 매포역과 강변의 모래알

허름한 농가 담밑 이끼로 뒤덮인 전의역

처음부터 전의를 상실한 술래잡기가 시작되네요

햇살이 천천히 기지개를 켜더니

속도에 길들여진 입맛을 달래려 블랙커피를 마셔요

빛을 쫓아 사라진 눈부신 날들이 녹아 흐르네요

멀리 KTX가 눈을 빛내며 달아나고

젊은 얼굴 하나가 차창 밖으로 어른거려요

농활 길에 기차에서 만난 백발의 일간지 기자

동료들 모두 감옥에 갔는데 혼자만 남았노라고

몇 개의 빈 소주병 서너 권 책이 시대의 양심으로 뒹굴던 날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의 흔적 눈치 챘어야 하는데

 

오래 묶여 있던 시간의 끈 잠시 풀어보니

추억 속 비둘기호는 무궁화 꽃잎 물고 깃대 위에 펄럭이고

서정리역 무궁화 꽃 참 서정적으로 피었네요

 

 


 

 

황진성 시인 / 역방향

 

 

KTX 안에서 뒤로 달린다

혹자는 후퇴한다고 할 지 모르지만 분명 전진하고 있다

이제 정확히 45분 후면 목표한 역에 도착할 테니

후진하는 시간이 없듯 해가 바뀌면 늘어가는 나이가 말해주듯

그것은 진정 전진일까 생각이 커지고, 경험이 늘어나고

지위도 상승하고 그러다 돌연 명퇴는 다가오고

몸의 기능들은 노쇠해 가는데

늘 앞만 보고 달려오던 시간도 잠시 주춤거린다

 

KTX 좁은 의자는 굳이 역방향을 고집한다

시속 300Km로 휙휙 멀어지는 시린 과거

그사이 공기가 숨을 쉬고 하늘이 드넓어진다

산은 흰 눈을 머금고 하얗게 웃는다

현기증이 난다 역시 역방향은 위험하다

갸웃한 산의 얼굴 아래 저녁 해도 모의를 하듯 거꾸로 잠수한다

모든 멀어져 가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차창에 입김을 불어 의문부호를 그린다

달려드는 눈송이가 느낌표로 받아 찍는다

 

아이가 훌쩍 자라 노인이 되어가도

세상은 역방향으로 전진한다

싼값을 지불한 대가로 멀미를 하면서

 

 


 

 

황진성 시인 / 절규*

 

 

 벚꽃이 흐드러진 계룡산 자락을 막 벗어나 사차선 도로 질주하려는데, 길 위 꽃잎 한 장 서 있다

 덜컥 내려앉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급히 차선을 바꾼다

 수의인 양 검정투피스 단아하게 입고 긴 머리칼에 눈물 젖은 붉게 상기된 앳된 얼굴

 달려오는 차를 망연히 바라보며 서 있다 축 늘어뜨린 두 팔이 채색되지 못한 채 목탄의 검은 선으로 남는다

 스치는 찰나 마주본 그녀 애절한 눈빛, 안돼, 빨리 나가, 외침은 산산이 부서져 공중으로 사라진다

 백미러에 보이는 검은 꽃잎 한 장 무언의 절규로 펄럭이고

 뒤따르던 차들은 조등처럼 비상등 켜고 세상이 일순간 정지해 있다

 

 


 

황진성 시인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수학과 졸업. 2005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등단. 시집 『폼페이 여자』. 화요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