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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흠 시인 / 시인의 모자를 쓰고
저 사람은 고독을 끌어안고 묘약도 없는 시인이라는 지독한 병을 앓고 있구나
시여 저 인간의 숨구멍을 뚫어주어라
죽어도 모자를 쓰고 죽겠다는 저 시인이 죽는 구나 저 아름다운 꽃이…….
-시집 <간 큰 고등어>에서
박민흠 시인 / 신음(呻吟)
세상에 나오면 그것이 시란 말인가
쓰지 못해 지랄병에 걸린 아귀새끼야 태중에서 사라질 운명을 거스르고 세상에 나왔으면
은밀한 고난의 숫자 천 번을 채우지 못하고 그래도 써야 한다면 네 살을 파먹어라
허락 없이 져버린 언어를 부둥켜 안고 밤새 썰음질 하는 너를 쳐다보려니 고뇌의 길을 서성거리는 은자처럼 고깔모자를 뒤집어 쓴 우라질 놈아
온 몸으로 울고 가는 노을을 보라 흰 뼈들의 눈빛을 보라 너는, 인류의 평화를 해산할 시인은 아직, 아니다.
네 무거운 머리를 잘라라 타버린 피가 흔적만 남을지라도 쓸모 없이 뛰노는 맥박을 잠재워라 그리고 개똥벌레 문하생으로 등록하라 시간이 없다.
사람은 너의 친구며 원수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저 네모난 세상을 찢어라 세상살이에 실패한 자여
…하여, 이제 내 손을 거쳐가는 것이 시라고 말한다면 겁이 나서 쓸 수 가 없다
밤은 나의ㅡ적(敵)이다.
박민흠 시인 / 천불사天佛寺가는 길
천근같은 발이 꾸욱 꾹 지문을 찍는다 땅의 창자에서 잘 마른 똥들이 머리를 내민다 외줄타기 하듯 매끈한 돌은 조심조심 피해가고 온몸의 세포들은 우르르 쏠리며 중심을 잃는다 언제부터 그 많은 인장 찍힌 돌들이 길 위에 있었을까 삼보일배로 수양한 크고 작은 눈 속의 돌무덤 한 가지로 모두 득도한 성자의 모습이다 머리수염 없는 염주알을 닮아서인지 산채로 공중부양 하는 염불소리로 맑은 징소리를 이웃들에게 보여준다 수련한 득음得音 속에 핀 씨알 소요유 보리수 나뭇잎 아래를 스쳐 지나가는 큰 바람도 절을 하고 천불도 절을 하고 시냇물도 쥐똥나무도 떨기나무도 아기동자승도 겨울 틈새를 쓸며 가며 온통 절을 하는데 번뇌 한소끔 뿌릴 때마다 나는 온종일 천불동 중머리에 앉아 툭툭 몸 지르며
박민흠 시인 / 해우*
깃발 펄럭이며 눈꽃이 피었다
미완의 시간너머 환멸의 명상기
발우 비우듯 불꽃 이글거리고
빛으로 떨어지며 돌기처럼 솟아난
신성한 미륵불
티끝만한 세월 손끝에 올려놓고
가슴 옥죄이며 해우 하는 날
단장의 시인으로 님 만나는 날
수직으로 떨어진 장엄한 죽음너머
승천한 너
박민흠 시인 / 삶이 사랑이라면
삶이 사랑이라면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설령 이별을 하였다고 사랑이 사라지지않듯 사랑은 또 다른 바다와같은 깊은 그리움으로 황홀한 변신을 하여 삶을 맛깔스레 빛냅니다.
사자의 눈빛보다 굵은 나무둥치를 껴안아도 사랑의 두근거리는 심장의 소리가 들려오고 잊을려는 두려움도 잊혀질 두려움도 모두가 사랑의 찬란한 얼굴입니다.
박민흠 시인 / 향수병
저 산은 날 부르고 달은 몸을 낮추고 도시 비둘기는 저녁 휘장을 찢고 센트럴 파크 뒷골목을 배회하는 깡패처럼 비수 같은 봄은 젊기만 한데 산골 귀제비처럼 어둠에 숨어 나는 지독한 향수병을 앓고 있다 파사(破寺)에 앉아 태워버럴 불필요한 언어라도 붙잡고 날 새도록 가슴 질러가며 나를 꾸욱꾹 저미는 밤의 공포탄
박민흠 시인 / 함박눈 내리면
언 밭에 흔들흔들
논둑길 끌며 가는 할머니눈썹 사이로
소복소복 함박눈 내리면
소근소근 봄은 꿈틀거리고,
맑은 빛으로 날아간 雪輝야 작은 빛으로도 충분한 흙의 나라에 사랑의 깃털 하나 심어놓고 님 계신 나라로 이사를 가고나
얼마나 사랑이 깊었으면 하늘만큼 그리움 심었을까 봄여름가을겨울 풍경처럼 찾아와 새벽을 깨울 雪煇 너를 그리며 빛의 세상으로 날아간다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린 어느 시인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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