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은주 시인 / 미래는 고양이처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0.
김은주 시인 / 미래는 고양이처럼

김은주 시인 / 미래는 고양이처럼

 

 

구름이 한 번도 정면을 보여주지 않은 계절

사람들은 오로지 시력을 맞추기 위해 발을 헛디딘다

꼭 필요한 공기의 움직임만이 있는 방

서로를 탐하던 연인들이 거대한 탄수화물로 굳어간다

하루는 아이들과 어울리고 하루는 어른을 연습하는

전능한 자들의 목소리에 화장이 입혀지는 밤

폭설을 참아내느라 지상의 주머니들은 소리 없이 분주하고

염화칼슘을 집어먹은 길고양이는 담장 밑에서 수분을 잃어간다

자고 일어나면 한 뼘씩 지붕이 자라있는 집에서

자신을 해체하지 않고도 존재증명에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어떤 하루는 반성하는 것만으로도 비밀이 생긴다

백설기가 된 기분으로 웅숭그리는 쓸쓸한 유령들

꾸준히 번지고 있는 안개의 출처를 모르고

쓰레기통 앞에 모여 저마다의 입술을 지운다

송곳니를 녹이며 서서히 벙어리로 진화하는

미래는 고양이처럼

 

 


 

 

김은주 시인 / 공원사

 

 

먼저 웃고

웃긴 이야기를 떠올린다

조경과 생활을 모을 때

 

모르는 사람은 몰라서

아는 사람은 알아서 흔해 빠지면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 되어

 

공중의 배드민턴 채가 만드는

구름 조각

노약자의 얼굴을 덮고 주무시는

흔한 벤치

 

비눗방울을 비누빵울로 귀여워하며

그림자 밖으로 달아나는 어린이들과

그림자를 놓치지 않으려는 지팡이 사이

 

아이스크림은 흐르고 시간은 녹는다

 

구름의 픽셀들이 흩어졌다 뭉치면

이상한 곳에서 아름다워지는 입장이 있고

축축한 심장과 눅눅한 과자는

비둘기의 것이 아니다

 

(바람 찢는 사람 나무 때리는 사람

귓속에 마을 전체를 살게 내버려둔 사람을

모른 척할 것)

 

쓰다듬고 남은 손길을 털어내느라

짤랑짤랑 손 인사를 실천하면

비닐봉지 속처럼

거대한 투명에 갇히는 공원

 

깨끗을 깨끝으로 이해할 때

이곳의 모든 것이

그런대로 마음에 든다

 

 


 

 

김은주 시인 / 이응의 세계

 

 

숲이라 불리던 나무들은 한동안 자라기를 멈췄다

그림자를 잘게 부수는 데에만 밤과 초록을 쓸 때

먹는 것에 색의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은 누구지?

나는 밤과 오렌지가 좋은 사람

일부러 맞춤법을 틀리게 쓰며 친해질 때

아이들은 자주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나무 밑에 둘러앉은 무리가

그늘이 짜놓은 레이스를 뭉개며 시끄러울 때

공원 벤치는 요의尿意를 겨우 참는다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덮고 잠든 척하는 남자와

빈약한 가슴을 감추기 위해 엎드린 여자

다른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을 하나의 병에 꽂아두고

같은 냄새를 견디게 하는 일 사이

투명한 벽을 종교로 삼은 늙은이들이 있다

 

마른 몸에 액체를 바르고

쓴맛과 단맛이 뒤엉켜 둥글어질 때까지

실온을 견디는 열매와

 

다 다른 맛이 날 때까지

손가락을 빠는 내가 있다

 

 


 

 

김은주 시인 / 자벌레와 나

 

 

어떤 마음은 태엽과 같아서 굴리면 굴릴수록 반대로 달린다

 

몸속에 동그라미가 생겼어

매일 조금씩 뚱뚱해지거나 가끔 홀쭉해진대

사라지지는 않는대

조용하고 이상하고 꿈틀거려

 

동그랗게 생겼는데 네모난 상자에 담겨서 세모 모양으로 잘라먹는

피자를 처음 봤을 때처럼 웃기고 괴상해

 

오물오물 오물을 씹는 기분이야

내키는 대로 피자 조각을 오려 먹는 어른이 되었지만

 

잘린 올리브와 치즈 부스러기 말라비틀어진 피망 따위가

상자 속에서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어색해

움직이는 동그라미의 주인이 된 것만큼이나

 

너의 걷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센티미터가 킬로미터로 모일 때까지

먼지 한 톨이 거대한 행성으로 떠다닐 때까지

이 세계의 둘레를 재느라 유연하게 뒤뚱대는

 

적을 만나면 숨을 참고 기어코 식물의 색으로 변하는

변신술을 내게도 가르쳐 줄래?

 

초록이 초록이고 파랑이 파랑인 곳에서

아무도 태어나지 않고 누구도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겐 이미 동그라미가 너무 많다

 

 


 

 

김은주 시인 / 사칙연산의 날

 

 

마저 우는 사람은 거의 없고

곡물의 기분을 이해하게 된 처음의 날에

엄마는 남은 초를 위해 나를 결심했나

자꾸만 케이크에 구멍을 내고

 

나를 버리고 엄마와 처음 사귈 때

서른다섯 살이던 나는

엄마와 헤어지고 나서

간신히 음력을 이해하네

 

두 개의 유방이 같아지도록 어깨를 흔들며 울고

춤을 추다가 우리는 만나게 될까

같은 높이의 스테이지에서

비슷한 스타일의 콧수염들과

 

달력은 오 일에 한번 작은 글씨가 되고

혼식을 권장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건강하지

종교를 바꾸고 처음 맞는 요일을 뭐라고 불러야하나

 

엄마가 숨겨놓은 초를 모두 찾으면

촛농처럼 알록달록한 기분으로 노래 불러야지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입가에 묻은

투데이 송은 끝날 줄 모르고 끝나 가는데

 

엄마는 왜 나에게 맡겨둔 생일을 찾아가지 않나

 

뒤집어라 엎어라

혼자만 다른 손바닥처럼 엎어져 등허리를 맞고도

도대체 속셈이 뭔지 모르고

 

 


 

 

김은주 시인 / 토렴

 

 

 햇빛만 보면 재채기가 시작되는 사람을 알고 있다. 소매 속에 하루치의 빛을 넣어두고서 필요할 때만 조금씩 꺼내 밝아지는 사람을. 당신은 매일 같은 시간에 어두운 통로를 지난다. 먼지의 결을 이해하는 촉을 가지게 된지 오래, 당신은 허름한 스웨터의 올이 풀리듯 후드득 시간을 줄여가고 있는 중이다. 통로를 지나면 당신의 방이 있다. 당신의 방에는 사기로 만든 그릇이 놓여있고, 위는 넓고 아래는 좁다. 야트막한 굽이 있는 그릇을 들여다보는 것은 당신의 묵은 취미다 말린 생화의 떫은맛을 선호하는 당신. 다음 생엔 티백에 줄을 매다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릇 안에 천천히 물을 따를 때 소매 끝에서 보윰한 빛이 잠깐 일렁였다 사라진다. 물의 체온과 그릇의 온도가 적당히 비슷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일과. 적당하다는 말은 당신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물이 이동을 멈출 때까지 당신은 손금을 들여다보면서 죽음이 머지않았다고 예견한다 당신은 기다림이 동사라는 것을 자주 잊는다.

 

 


 

 

김은주 시인 / 유원지의 방식으로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오늘은 내가 가장 조숙한 기분

오늘의 구름은 본격적이고

아무도 다가올 표정을 예방할 순 없어

 

페달을 밟아요

꽥 꽥 꽥 꽥

호수를 가르는 규칙적인 오리떼의 리듬으로

 

외발 자전거 위에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더욱 빨개진 엉덩이의 전천후성처럼

 

(하지만 원숭이에게 흉내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페달을 밟아요

오르간의 작은 발건반을 찍듯

하지만 발끝으론 사과의 상상을 멈추지 말 것

 

(호흡이 어긋나는 순간 참기 힘들 정도로 표정이 마려워지거든)

 

서커스단의 고별공연에서

끝날 줄 모르고 돌아가는 빈 접시의 반동

되 뚱 되 뚱

기울일 곳을 찾는 엉덩이들

 

(방수 신발 속에 페달을 감추면 그 어떤 표정도 스며들진 못할 거야)

 

오늘의 구름은 본격적이고

우리는 모두 다른 무늬로 흩어지길 원했지만

 

 


 

김은주 시인

1980년 서울에서 출생.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희치희치>. 2014년 애지문학회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