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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연희 시인 / 태양의 도서관
시간 칼잡이를 피해 달아난다. 달아나다 발이 베이고 다리가 베여 얇게 저며진다. 과거의 나는 이미 핏방울이 말라붙은 고깃덩이. 납작하게 엎드려 알 수 없는 숲으로 느리게 기어간다.
욕망 나비의 꿈을 꾼다. 낮게 기어 속잎처럼 돋아나는 시간을 갉아먹는다. 바람에 흔들리며 벌레의 문장을 쓴다. 바람이 날개의 욕망을 사육한다. 벌레의 문장은 바람의 문장. 날개로 자랄 때 까지 허리를 접고 번데기 몸속에 바람을 가둔다.
시인들 숲은 태양이 관리하는 서고의 일부. 초록의 책들, 줄지어 땅에 꽂혀있다. 나무의 한 문단을 읽는다. 매혹적인 것은 완성되기 직전의 것. 구름 한 마리 숲 위로 날개를 편다. 나뭇잎 겹겹이 적힌 나비의 문장, 바람에 넘겨질 때마다 잎사귀에 가늘게 매달린 몸 흔들린다. 숨죽여 느리게 기어가는 시간. 시간의 포를 뜨는 칼잡이가 과거의 고깃덩이를 벗겨낸다. 몸속에 가두었던 바람을 꺼내 젖은 날개를 말린다. 바람이 읽다 접어 둔 숲의 귀퉁이가 바스락거린다.
반연희 시인 / 거울아, 거울아
하나, 둘, 셋, 입속으로 가는 뱀 한 마리 기어들어요 좁은 터널과 개 짖는 마을을 지나고 비닐하우스를 지나고 덩그러니 버려진 집 앞에 도착해요 검푸른 파꽃이 도깨비 방망이처럼 피어오른 밤이에요 담장 옆, 묶인 염소의 눈동자에 별 두 개가 박혀있죠 귀를 방바닥에 바짝 붙인 이불이 숨을 죽이고 있어요 술취한 대문이 마당에 드러누워 있어요 대문을 세워보려 안간힘을 쓰던 바람은 담장을 쓰다듬다 슬그머니 집을 나가요 독 같은 시간이 담쟁이넝쿨 기어가듯 벽을 타고 돌아요 거미들이 그물을 치고 집을 말아 올려요 꿈틀거리던 번데기 속 이불들이 눅눅해졌어요 날개를 펼치고 팔랑거리고 싶은 이불의 꿈에 자꾸 주름만 생겨나요 망각의 이불의 덮은 내가 누워있어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프니? 흰머리가 거미줄처럼 엉키기 시작한 내 목에 사과가 걸려있대요 아주 빨갛고 예쁜 사과 한 조각이요
반연희 시인 / 다락방, 나를 끌고 다니는 기억들
십여년 전으로 기억된다. 길을 가다 일명 ‘도를 아십니까?’의 일당에게 붙잡힌 적이 있다. 나의 앞뒤로 두 사람이 에워싸고 ‘참 영이 맑아 집안에 죽은 남자의 귀신이 나를 따라 다닌다’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듣고 헛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간혹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계가 있어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사실 또 그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은 20대 초반의 새파란 나이에 돌아가신 막내 삼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막내 삼촌은 큰형의 맏딸인 나를 귀여워해서 일곱 살짜리 나를 데리고 극장도 다니고, 다방도 다니셨다. 그 때 다방에서 들었던 곡이 신중현의 ‘미인’ 이었다. 지금도 그 곡을 기억하는 것은 ‘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로 시작되는 노랫말과 신나는 리듬에 어린 내가 계속 흥얼거리며 한 동안 지냈기 때문이다.
그런 삼촌이 갑자기 주검이 되어 돌아왔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는데 뻣뻣해진 삼촌을 염하는 장면을 어린 내가 우연히 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어른들은 어린 계집아이가 그런 장면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시선에 들어 온 것은 흰 천으로 꽁꽁 묶인 하나의 돌기둥이었다. 지금의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였던 시절,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가까운 곳에서 인식하게 되었던 사건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방 6개에 다락방이 있는 단층 주택이었다. 화초를 좋아하시던 부모님 덕에 집 정원에는 온갖 희귀했던 화초며 나무들이 많이 있었고, 담 대신 키 큰 측백나무로 울타리를 둘러 집 밖에서 보면 측백나무 숲에 능소화가 둘러진 갈색 나무대문 하나가 달려 있는 것만 같아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주 우리 집 쪽을 기웃거리곤 했다. 나는 정원에서 노는 것도 좋아했지만 제일 좋아했던 것은 다락방에 혼자 올라가 오래된 물건들을 살펴 보는 것이었다. 다락방에는 작고 예쁜 함들이 많았는데 그 작은 상자들 속에는 의외의 물건들이 들어 있곤 했다. 가령 잘려진 긴 머리다발이라든지, 일기장 같은 것들.
일기는 나의 어머니가 시집오시던 날로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날짜는 생각나지 않지만 집안의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 내용이 그랬다. 첫 소절의 문장이 아직도 기억난다. ‘올캐는 개미허리를 가졌다’ 이 일기는 돌아가신 고모께서 쓴 일기라는 걸 조금 뒤에야 알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가 객관적으로 묘사된 문장을 처음 읽은 어린 나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 어린 나에게 어머니는 객관적 관찰의 대상이 아닌 철저하게 주관적인 우상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른들게는 내가 그 일기를 읽었다는 말을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고 있었다. 집안에서 고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잃으신 할머니를 슬프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여고생이 된 후 우연하게 큰 이모에게 우리 집의 과거사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였다. 물론 큰 이모는 내가 그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무심코 말씀을 하신 것이 내가 고모의 죽음에 대한 전모를 알게 된 계기다 된 것이다..
고모의 이야기가 집안에서 금기시되었던 진짜 이유는 고모가 자살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사랑 때문에. 사귀던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어른들이 보기에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반대를 하셨다고 했다. 사랑의 암초에 걸린 두 사람은 동반자살을 하기로 하고 약을 사서 산으로 같이 올라갔다고 한다. 고모가 먼저 약을 마시고, 남자는 약을 마시려다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꾸었다고. 그때가 내가 네 살 무렵이었다는데 그렇게 내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고모와 조우하였다.
고모는 문학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다락방에서 발견한 것들 중에는 레코드판들도 있었는데 나는 비틀즈와 클래식 소품들을 꺼내서 자주 듣곤 하였다. 그리고 김월하 명창의 시조창레코드판도 같이 있었는데 ‘월하의 공동묘지’라는 귀신 영화가 유행했던 때라 호기심에서 처음 그 시조창을 들었던 것이 그 시조창을 따라하게까지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시집도 다락방에서였다. 김소월의 시집이었다. 고모의 것이었는지 막내삼촌의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한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흰색 양장본에 은박으로 글씨가 박혀있었다. 그 때는 한자를 잘 모를 때라서 한자가 섞여 있는 구절들은 혼자서 끼워 맞추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무렵 김소월의 시를 흉내 내서 시도 몇 편 썼던 것 같다. 열 한 살짜리가 김소월의 시를 그냥 아름다운 노랫말 정도로 이해했던 듯하다. 시가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내 시 쓰기는 충격적이었던 막내삼촌의 죽음과 다락방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 된다. 처음으로 시집을 본 것도 다락방이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다락방은 나의 보물 창고이자 비밀이었다. 죽은 삼촌과 죽은 고모가 아끼던 물건들이 유폐되어있던 곳이었으니 나는 죽은 영혼들과 함께 놀았던 셈이다.
그런대로 유복했던 유년기를 지나 내 사춘기 시절에 집안이 어려워졌다. 이 것 저 것 벌이던 사업이 모두 실패하고 아버지께서 보증을 잘 못 서시는 바람에 살던 집까지 넘어가게 되었다. 집안에 빨간 딱지들이 붙고 우리가족은 산이 가까운 허름한 곳으로 옮겨가야했다. 다락방과도 영영 이별이었다. 내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에 술에 빠져 지냈고 어머니는 네 아이들의 학비를 대느라 잠이 부족하도록 일을 하셔야만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힘겨운 날들이 계속 되었다.
이십대 중반쯤에 옛집이 그리워 일부러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측백나무들은 모두 뽑혀졌고, 정원이 있던 자리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뒤편의 건물은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알던 옛집은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었다. 능소화 넝쿨 대문도, 갖가지 종류의 동백나무와 방울꽃이 달리던 유카와 비파나무와 매화나무, 목련나무도. 그리고 다락방도. 요즘도 가끔 옛집이 꿈속에 나타난다. 어쩌면 내가 시를 쓰는 것은 없어진 옛집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다락방에서 시작하여 다락방으로 향하는.
친한 이웃으로 6년째 알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 자신이 무속인임을 밝힌 이웃이 말하길 내 속에는 슬픈 소녀가 있다고 한다. 계속 어른이 되라고 강요받는 슬픈 소녀가. 그 이웃의 말을 듣고 혼자 조용히 혼잣말을 해보았다. 아마도 그 소녀는 계속 옛 다락방 속에서 길을 잃고 있을거라고.
반연희 시인 / 눈물의 역사
가령 물속에서 계속 돌아 소금을 만드는 맷돌이 있다고 하자 물속으로 들어간 여인의 흰 목덜미가 예뻤다고 하자 여인의 손짓에 폭풍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사내의 푸른 눈동자에도 뜬구름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걸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희망이란 것이 뜬구름으로 둔갑한 어느 날 세상의 모든 일이 싱거웠다 바람이 부는 대로 홑이불처럼 펄럭였다 늘 구름은 뜯긴 빵처럼 하늘에 걸려 있고 불빛 없는 캄캄한 밤이 계속 되었다 거품을 물고 이야기하는 파도의 몸짓이 점점 절벽으로 굳어갔다 방향을 잃었다 나를 따라 깊은 물속으로 기꺼이 들어온 사내는 점점 맷돌처럼 변해갔다 맷돌에서 가루가 된 꿈들이 흘러나왔다 먼지가 된 미래가 젖은 종이배를 타고 눈가로 흘러내렸다
반연희 시인 / 이 시대의 소통
개와 마주 앉아 함께 짖는 것 독사와 마주 보고 혀를 깨무는 것 쥐와 마주앉아 서로의 머릿속을 갉는 것 튀어 나온 이빨로 서로를 갉아 먹혀지는 것 서로 뒤엉켜 꼬리가 머리인지 머리가 꼬리인지 잊어버리는 것 내가 내민 손에 박힌 가시 더 깊이 박아 넣는 것 술잔의 넘친 거품처럼 식탁 밑의 바퀴벌레처럼 밟히기 전에 재빠르게 도망치는 것
반연희 시인 / 숲의 기원
의자 하나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의자 하나 아래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의자 다리에서 뿌리가 자라나고 팔걸이에서 나뭇잎이 돋아나고 가지가 벌어져 잎들이 그늘을 이루고 새들이 가지 위에 앉아 알 수 없는 이야기로 떠들고 눈 속으로 구름이 흘러가고 도끼를 든 아버지가 나무둥치에 기대 낮잠을 자고 꿈속에서 아버지는 돌멩이를 던져*나를 만들고 아버지의 꿈 밖으로 뛰쳐나온 나는 나무에 도끼질을 하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긴 상자를 메고 지나가고 상자 속의 돌기둥이 덜썩거리고 눈 속에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흙에 덮인 상자가 새싹들을 밀어 올리고 가는 나뭇가지 사이로 구름이 흘러가고 바람이 건반을 누르듯 나뭇잎이 떨리고
의자에 앉아 피아노가 된 나무를 생각하고 숲이 될 나를 생각하고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신은 대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고 데우칼리온과 그의 아내 파라만 남긴 다음 그들로 하여금 돌을 던져 인간을 재창조하게 했다고 한다.
반연희 시인 / 마법거울, 전국 통신망
마녀에게만 전해져 온다는 마법의 거울, 조각조각 쪼개져 누구나 거울 하나씩 가지게 되었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귀를 가진 이는 누구니? 높은 코를 납작하게 깎은 공장은 어디니? 곰 같은 남자의 저녁요리에 마늘을 넣어야 하니? 쑥을 넣어야 하니? 의문투성이 당신을 거울에게 전송해. 장화 신은 고양이의 변신법을 익혀 거울 속으로 새들을 날려 보내지. 새들은 자주 거울 밖으로 튕겨나 당신이란 벽돌에 부딪쳐 떨어지는군. 거울은 서로의 조각을 찾아 거미줄을 만들어. 거미줄을 따라 거짓말 하는 성벽을 기어올라 봐. 이제 비밀이란 없어 당신, 거울에게 이미 주문이 걸렸어.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욕망을 전송하는, 아무도 모르게 당신을 쥐로도 만들 수 있는 주머니 속 마법 거울. 세상 모든 걸 비춰준다고 당신에게 달콤한 주문을 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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