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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훈실 시인 / 구멍의 세계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1.
고훈실 시인 / 구멍의 세계

고훈실 시인 / 구멍의 세계

 

 

불에 그을린 돌이

구멍까지 첨부했다

까칠했던 시간과

무한천공 사이에서 여자들

바닷속으로 자맥질한다

구멍은 구멍을 먹고 자라서

내가 깃든 구멍은 몬순을 닮았다

후덥지근한 밤들이 적란운처럼 쌓이던 그곳

거기서 잠을 자고 싶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고향이라 부르는 것도 아득해진

검은 해변들

속수무책 구멍 난 당신을 만진다

숭숭 뚫린 가계家系가 누대를 잠영하고 있다

 

-부산시문학(2022)

 

 


 

 

고훈실 시인 / 모슬포

 

 

모슬포 바다를 본다

아버지보다 늙은 남자가 지나간다

비루먹은 개 한 마리 내 눈치를 보며 옆에 앉는다

개의 무릎을 베고 누운 등대 불빛이 방파제를 떠돌고 있다  

 

아직 고패질을 멈추지 않는

파도,  

 

슬하를 떠나지 못한 바다가 내게로 온다

 

 


 

 

고훈실 시인 / 바다의 알고리즘

 

 

바다가 생의 척추가 되는 순간부터

저 둥근 해원海原을 빠져 나갈 수 없다

아버지의 파도는 0과1의 미로

이물에서 고물로 이어지는 포물선이

출항을 허許하면 난바다 어디쯤에서

아버지의 투망은 기호열이 복잡했다

물오른 바닷장어 우럭 쏨펭이

한 그물씩 올리면

어긋난 타이밍처럼 빈 햇살만 가득했다

바다는 갈수록 가난해져

열일곱 처음 배에 올랐던 기억과

수심水深을 읽는 아버지 등 마저 홀쭉하다

촘촘한 그물로 아버지를 에워싼

생의 비린내가 무한 생성되고

못 박힌 손바닥에 성근 손금이 남은 건

기억이 실행을 파도처럼 깎았다는 증거

막막하게 펼쳐진 수평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천이고 만이라서

당신이 명명한 바다는 무한 복제된다

파도가 과부하로 출렁이고

컵라면 뚜껑에 노을이 미끄러지면

흰 포말의 데이터가 바다를 귀납하고

출력하는 저녁이다

어창에 펄떡이는 몇 마리의 기호들

우주를 향해 팽창하다

별처럼 되돌아 와

오늘의 허선虛船은 십진법 끝에 걸린 비밀번호다

쓸모없는 메트릭스가 몇 토막 잘려나가

내일은 알짜 프로그램으로 만선을 꿈꾸는

출항은 영원히 미지수다

아버지의 해문海門만이 닫힐 줄을 모른다

 

-제10회 등대문학상 수상작(2022)

 

 


 

 

고훈실 시인 / 블루

 

 

 구름이 기우는 아침에 신문을 펴들고 나에게 기우는 커피를 마신다 손을 참지 못하는 손잡이와 감자칩 부스러기들이 아래로 기운다

 

 우리 프로럴향의 샴푸가 디스코파티를 탄다 한쪽이 기울면 반대편이 솟는 천진한 게임을 더는 믿지 않는다 어제의 기울기를 욕실 밖 낡은 소파가 버티고 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를 타고 간다 속도는 낡은 창처럼 익숙해지다 폭설을 만나고 난 ㄷ자 횡단보도의 비대칭에게 손을 내민다 네가 빠진 소유격은 기울기가 심하다

 

 비를 맞다 아이패도 화면 속으로 사라진 너, 엘리스의 구두코를 바닥에 찍고 있다 팔나 흔들림이 화면 밖에서 젖고 너는 비스듬한 각도로 우주에서 점멸 중이다

 

 신문이 밤새 구독한 현상은 먹장 구름에 숨고 하루치의 하루살이와 셀 수 없는 오독이 감시 카메라를 엿본다 너를 뺀 모닝커피는 갸우둥 편파적이어서

 푸른 색 커튼을 울컥 당긴다

 

 


 

 

고훈실 시인 / 가지방울을 흔들고

 

 

 사방을 향해 폭죽을 터뜨린다 긴 자루가 달린 원형고리, 일곱 개의 방울이 달려 있다 네 개로 뚫린 구멍안에 작은 구슬이 한 개씩 들어 있는 가지방울, 방울의 폭죽은 금속성이다 쇳소리 하나에 늦은 매화가 떨어진다 나는 복천 박물관의 한 귀퉁이로 쏠린다 청동기의 하늘에 녹이 슬었다 둥근 무릎을 가진 여자 좁은 주방에서 종일 그릇을 씻는다 부식된 하루가 낡은 골목을 꺽는다 네모난 등 아래 두 딸과 다리를 맞대는 저녁, 무릎에선 방울소리가 났다 반지하 창문 너머로 청동의 저녁을 먹는 세 모녀 사방에 네 개의 구멍을 가졌건만 방울은 숨을 쉴 수 없다 방울 소리는 물 속의 고요를 파먹고 청동의 안개를 두른다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넣은 봉투가 책상위에 놓여있다 아침이 와도 방울은 스스로 흔들릴 수 없다 납덩이같은 매화를 흔든다 둥근 무릎속으로 작은 구슬이 흘러든다 세 여자의 직립을 잃은 하루가 지워지고 매화는 뒤란에서 부서진다 일곱 개의 부릅 뜬 눈이 한 입을 단 철방울, 나를 끌어 당긴다 방울을 흔들던 손이 나를 흔든다 벼랑으로 밀어 부치며 나를 옥죈다 꿈은 손톱 사이에 낀 검은 때라고 방울이 악쓰고 있다

 

-<시인정신> 2014년 여름호

 

 


 

 

고훈실 시인 / 에어로졸

 

 

 아침에 쌀벌레 몇 마리를 죽였다 퇴적층 어디선가 발을 빼 온 바 퀴벌레가 밑동을 갉아 먹는다 파리가 두 손을 빌고 있는 것 같은 지하철 계단의 남자, 난 운동화를 끌며 지하도로 내려간다 수많은 어둠이 지나간다 구불텅 접었다 펴는 자벌레가 바나나를 익히고 있는 청과상을 지나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를 종점에서 만난다 작은 방 책상 아래로 복개천 흐르고 머리가 맑아지는 약은 파란 줄무늬를 둘렀다 무거운 눈꺼풀이 창궐하는 공간에 갑자기 여름이 왔다. 올핸 해충과의 전쟁이 서사적일 거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구겨진 셔츠 위로 비문증의 모기떼가 난다 빛 속으로 숨는 날벌레가 어둠을 묻혀와 쌀벌레들 우글거린다 손에 힘을 줘 에프킬라를 뿌린다. 빛이 부러지고 의인화를 끝낸 내가 툭 떨어진다

 

-시집 <3과 4> 2017 에서

 

 


 

 

고훈실 시인 / 고려 엉겅퀴

 

 

곤드레 나물 축제

네이버 검색란에 곤드레가 지천이다 연한 잎이 커서처럼 퍼진다  

 

기차가 설 때마다 사람들이 쏟아진다  

허기가 시장으로 몰려온다

잎의 시절에 걸터앉아 곤드레 나물을 비빈다

간장과 깨소금을 더해 입 위에 입들이 포개지는 봄,

푸성귀는 시간의 구석을 키운다  

하루치의 잎사귀는 하루씩 꽃대를 올려

늦가을 곤드레 밭, 보랏빛 엉겅퀴 꽃이 사방에서 터진다

식물학자들은 비로소 고려 엉겅퀴라 한다 잎의 시절, 한 번도

짐작 못한 대전(帶電)이 꽃과 나를 관통 한다

 

엉겅퀴를 곤드레로 착란한 순간

온 몸이 감전된다

꽃의 계절을 싹둑

자른 죄

어떤 과오는

꽃으로 갚는다는 걸, 나는 몰랐다

 

 


 

 

고훈실 시인 / 타투

 

 

첫 바늘의 감각은 완성도 높은

죽음의 맛이죠

내 손목에 장미를 그려 주세요

결코 어두운 흔적의 파편이 아니에요

알 수 없는 무기와 가시를 구비한

내 안의 무늬들

목욕탕 흐릿한 거울 앞에서

나를 제거하는 의식이 거행되던 순간

타인들로 만들어진 내가

나를 멀뚱히 바라봤죠

붉은 방울이 칸나처럼 피어나는

흰 욕조, 타락한 창밖으로

아래층 담배연기가 지나가고

난 오래 전진한 의자처럼 낡아갔죠

입묵(入墨)의 어루만짐,

선명한 자해흔 위로 방울방울

터지는 흥겨운 장례식

검고 푸른 꽃들이

예고도 없이 들이 닥치네요

잉크를 고르고 도안을 오려내

내 현기증 뒤에

앉아 있어 줄래요

마지막 바늘이

질문을 지울 때까지

 

 


 

 

고훈실 시인 / ㅋ의 세계

 

 

왼손 새끼손가락이 변방을 더듬거린다

Z와X 사이 손톱만한 틈새에 고비보다 넓은 사막이 자란다

크크 카카 키키 어느 것으로 웃어야 할까 어느 웃음을 건너야 할까

 

대가리만 남은 ㅋ의 채팅창에 모래가 서걱인다 제 속에서 꺼낸 메모는

 

우리 부장님한테는 ㅋㅋ을 써야하고

사장님은 ㅎㅋ이던가

ㅋㅋㅋ딱 그만큼 웃기니까 오버하지 마시고

 

웃음이 제 몸의 온도를 잰다 웃음을 껴입은 도시가 서로 오염 된다 열이 끓는 네 개의 손가락을 얹어 본다 입장불가, 쓸모가 적은 것들은 새끼손가락과 친하지

 

사막에 고속도로가 생기고 ㅋ이 밖을 내다본다 낙서와 문서의 경계에 모래가 수북하다 ㅋ이 ㅋㅋㅋㅎ 영토를 넓힌다 머리 뒤가 뻥 뚫린 줄도 모르고 귀가 떨어진 줄도 입이 부르튼 줄도 모르고 웃는 대가리

 

초성의 총구가 열린다 ㅋ이 낳아 기른 감정들이 캐주얼하게 터진다 가족력을 가진 표정은 간헐적으로 피곤해 새끼손가락을 입가에 심는다 사막을 재구성한 웃음이 키보드에 수북하다

 

손톱 밑에는 검은 숲이 지문을 지우고 있다

 

 


 

고훈실 시인

제주 출생. 2010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시를 위한 알레그로』 공저 『3과 4』. 모래톱 문학상,  독도 문학상 수상. 두레문학회원. 동서대 사회교육원에서 시창작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