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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한라 시인 / 키사스 원칙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1.
장한라 시인 / 키사스 원칙

장한라 시인 / 키사스 원칙

 

 

삼킨 것 너무 많아

말수가 줄어든 바다

 

주는 대로 받아먹는

바다 때문에 운다

 

조만간

물거품이 되겠지

바다 덕분에 우는 나도

 

 


 

 

장한라 시인 / 까만 민들레

 

 

나는 까만 민들레

지붕 위에서 산다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땅보다

절망의 바다보다 위안이라

나락의 끝 닿은 곳

겨우 겨우 받은 꽃말, 피 ㆍ난 ㆍ민

 

빈곤과 내전의 아픔이 살점이 되어버린

푸른 혈맥은 얼룩진 회색 반점

마른 뿌리 깊게 내리지 못해

갈래갈래 꽃잎 흩어지고 찢겨져

차별의 세상에서 살아야 했고

끝끝내 살아 있어야만

 

타고 흐르는 별빛 한 줄기

낯선 진실은 드러나기나 할는지

어쩌다 까맣게 피었는지

어쩌다 난민으로 올라앉았는지

관심 어린 물음들도 궁극에는

찬란한 한계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

 

곱게만 보지 않는 저들에게

가난하지도 불쌍하지도 않은 나는

지붕 위, 까만 민들레

이대로 당신의 이웃이 되고 싶은

 

 


 

 

장한라 시인 / 이어도 묵시록

 

 

청정 물결 너머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자체로 신비롭다

 

무량 세월 씻긴 낮달이 바닷속 정낭을 비출 때

가슴 출렁이며 수문이 열린다

침묵의 바다에 띄우는 상군해녀들의 염원은

생명의 밀어들로 현주소를 불러내고

 

바다로 가는 길을 읊어주는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이어도

이어도에 우뚝 선 종합해양과학기지

우레와 폭풍이 뒤엉켜 때론 격렬하게 휘몰아치곤

싹쓸이 할퀴며 삼키는 것들을 조명한다

 

파도가 살아 있어

이어도 키 높이로 살아 넘쳐

나무를 심어 섬을 자라게 하면 좋겠어

평화의 열매를 물고

독도의 온기를 품고서

일천 킬로미터 날아든 괭이갈매기

사철나무를 심겠어요 변함없이 신비로워

 

바다의 종족들에 햇살 내리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대한민국 최남단

풍랑을 밀어내고 물새알 품고

뿌리내린 사철나무 가지마다 활짝 핀

이어도 만세 만세 만만세

 

해경 경비함정 3006함, 5002함 한바다로 맴돌다

수많은 섬들의 환호속에 목청껏 외친다

섬이 일어선다 수문이 열린다

이어 이어 이어도가 울창하다

 

 


 

 

장한라 시인 / 압화

 

 

지금 여기

그대의 꽃자리

 

은하수에 오랜 안부를 전하고

상념의 깊은 골짝 따라

두려움도 접는다

 

올레에서 마주치면

눈빛이라도 주고받자

 

사랑이 없었다면

시들었을 꽃잎 위로

 

살아온 생의 두께만큼

어린 봄 실눈 뜬다

 

 


 

 

장한라 시인 / 종달리 돈지할망당

 

 

고통도

지켜보면

삶의 뿌리가

된다

 

소금바람

휘날려야

푸른 바다

봄 오리니

 

등 굽은

사스레나무

한 몸 되어

다독인다

 

 


 

 

장한라 시인 / 징조

 

 

당신의 하늘로

목 길게 뻗는다

윗입술 펄럭이며

누런 말 누런 이 드러내며 후레멘

 

한 뼘 땅도 없으면서

대지주 이름으로

기분 좋은 씨수말 후레멘

 

번식의 계절 달콤한 약속처럼

 

쌍태 노루 뛰노는 들판

가슴 하나씩 맞바꾼 사이

강렬한 불빛 후레멘

 

 


 

 

장한라 시인 / 돌문화공원 다녀와서

 

 

초전에 집을 짓고

서울 사는 아들네도

멀리 호주 사는 딸도

돌돌돌 부를 생각

 

아침이

거짓말처럼

하늘 아래 다다른

 

-《제주시조》 2023. 제32호

 

 


 

장한라 시인

부산에서 출생. 1985년 김남조 시인의 사사를 받으며 시 입문. 2015년 첫 시집 『즐거운 선택』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철원이, 그 시정마』 외 3권 상재.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9년 부산펜문학상 작가상 수상. 『부산펜문학』 편집장, 시전문지 『시와편견』 편집장. 도서출판 『시와실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