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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옥 시인 / 매혹의 사선
손을 스친 것뿐인데 유리 도장이 흔들린다 천천히 구르다가 한 지점에 와서 급히 구른다
책상 한 쪽이 깊고 오른쪽 다리가 짧다는 건 서 있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에 치명적이다
소나기가 내리는가 했는데 마당이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널어놓은 콩을 잊고, 자루 받침대 한 쪽이 내려앉은 줄도 모르고 때죽나무꽃에 코가 굵어져 콩 한 말을 다 쏟았던 기억
어서 잡아야 해, 빨리 잡아라 누군가의 조종도 없는 명령과 요구 사이에서 악 소리만 지르다 그 밤에 콩 한 자루를 다 닦아내야 했다
떨어진 유리 도장의 파편은 불꽃이다
오래 달리다 주저앉으려는 찰나에 명배우가 된다는 속설이 있다 우중 노숙의 시간을 견뎌온 사람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때 불꽃의 현자가 되기도 한다
구겨진 방 안, 창틈으로 빛이 다가온다 푹 떨어진 빛은 태양의 저장고다
권영옥 시인 / 넝쿨
버려지니 숲속 나뭇잎이 별의 생기를 준다 이파리에 빛이 튀겨 온 숲이 날개를 휘젓는 바람이다
늘, 술에 절여진 네 치마만 빨고 가시와 꽃물의 흔적을 치대던 날들이 나무 밑둥에 놓여 해먹의 깊이에 든다
거뭇하던 손이 시원해진다
소매 걷은 팔과 더 필요한 몸통 하나를 달고 새벽 사막보다 차가운 속을 헤매던 날들
하나의 고단이 몇 사람을 살린다던 그 지린 헛말,
이젠 야비하지 않다
넌 아직도 겉껍질에 충실하구나
이런 식으로살아서는 안 된다고 거품 불며 말했지만 항상 귀뜸으로 흘려보냈지
몸이 흑빛이고 마음도 녹을 푼 수심이구나
수발들 손이 없다고 흙탕물에 첨벙댄 아들 옷가지를 던지며 삶이 왜 이러냐고?
권영옥 시인 / 생래적 물뼈
아들은 세계를 누비는 농구 후보선수다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있는 만큼 근력은 녹아내리고 볼은 푸른 낙과로 일그러진다. 넣고 빠지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네가 손을 하루 수 천 번씩 골대 안으로 밀어 넣지 않으면, 물렁뼈는 통뼈로 변하고, 그 모습에 취한 사과나무도 물관을 빠르게 돌린다. 사과 가지처럼 손은 천공을 수시로 뚫고 꽃대를 밀어 올려라. 그 순간 봄의 심장에서 불꽃이 터질 것이다 그는 뭔가? 아들도 주전선수 되려고 밤낮없이 트램폴린을 뛰는데, 다리 근육이 멀쩡하고 양 다리까지 튼튼한데, 주저앉아 피는 물꽃대라니, 물수련이라니.
권영옥 시인 / 시래기
벽에 매달리기 전 배추 줄기는 풀나무였다 바람을 뒤집어쓰고 비와 안개 틈에 끼어 푸른 갈퀴 속으로 가지를 뻗어 나갔다
햇살이 느슨해질 무렵 풀나무의껍질은부어서 생기를 잃고 서리와 강풍이 밀통해 땅과 분리하는 동안
흙의 온기가 등허리의 물관으로 남아 몸을 덥혔다
구부러진 채 냄비에 끓어 넘치고 나물 전에몸을 말아서 쌓여 있다가 한 접시 묵나물로 변해수저에 잡힌지금
풀나무엔 검불 흩날리던 강풍의 그림자가 묻어 있다 그 그림자는그를 쿨럭이게 하고 다 늦은 저녁 뒤웅박을 치게했던 것이다
권영옥 시인 / 노동자의 화폭
벽돌을 나르고 월급을 받았다
어둠을 감은 은행나무를 지나 쪽방을 괴고 있는 담벼락을 지날 무렵 가로등이 집에 두고 온 아이들 눈처럼 켜졌다
어린 양들의 등에 성애가 붙은 것 같아 마음 가닥이 졸아 든다
고향 쪽 밤하늘에 박꽃이 하얗게 돋았다
은행나무에 걸린 비닐봉지가 숯검댕이 속을 아는지 양 갈래로 찢긴 채 날린다
양을 안고 천천히 달 속을 걸어가는 여인의 귀걸이가 박꽃이어서 보름빵을 한 가득 샀다
꿈속을 달려 방문을 연다. 보름달을 꼭 쥐고 자는 세 살바기 모포 속으로 달 하나를 넣어주고 나오면서 이 다음엔 바다 건너 말쑥한 사람들의 말 속에 말을 섞으며 살자고 했다
그 새벽에 쪽방 옆 은행나무는 달을 품고 서 있느라 입술이 파랗다.
권영옥 시인 / 연노랑
암탉은 둥지에 앉아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달뜨게 울며 몸을 꼬기 시작했습니다 기웃거리던 달도 붉은 깃을 세우는 암탉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지푸라기가 깔린 둥지 속, 달은 암탉 품으로 쏘옥 들어갔습니다
양수를 흘리며 자궁을 빠져나오는 달,
반 아흔 삼촌은 쇠죽을 끓이다 말고 부지깽이로 솥을 내리쳤습니다
달과 닭이 섞이는 일은 눈빛을 쏘아 올려 마음 감아내는 일이지만 인연 하나 만들지 못하는 저 체취 제 맘으로부터 강물을 흘려보내 자맥질만 합니다
이웃 닭들이 헛간으로 몰려왔습니다 삼촌은 허청거리며 닭들을 몰아냅니다
보름 전, 이사 온 노처녀가 담벼락에 기대어 이 광경을 보고는 실없이 웃고 있습니다
달이 마당을 돌아다니며 애기똥풀꽃을 싸놓았습니다
권영옥 시인 / 빈혈을 그리다
모자만 그리는 화가가 전시회를 열었어요 사방 벽에는 해변 모자들이 태양빛을 덮고 누워 있었어요 흰색 아으리풍 모자 하나를 써봤지요
벽과 벽이 서로 얽히다 풀어지고 다시 몰려다녔어요 벽 모서리에 앉아 눈을 감았지요
한 아이가 비를 맞으며 걸어옵니다, 유방 한 쪽을 잃은 엄마는 비가 새는 방안에서 파리떼와 함께 누워 있어요, 아이가 모자로 빗물을 받아 마시네요, 맹독성 허기는 내 치맛자락을 씹고 있지요, 힘을 다해 골목을 빠져나왔어요, 바다를 품어 안은 청색집 마당에서 먼저 나온 아이, 그 얼굴엔 도장꽃이 하얗게 피어있어요
허기는 감출 수 없는 무늬죠 7월 그림 속 아이 울음을 회화로 이해했어요 화가가 그린 모자에서 유선이 돌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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