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인미 시인 / 여행의 이유 -포크와 나이프가 멀어질 수 없는 거리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성숙하지 못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너를 쫓다 나를 비껴간 감정이다
숨이 모이고 모인 숨이 비워지는 일처럼 맹목적이다
신통神通처럼 나를 믿어 나를 의심치 않지만, 지나가는 봄날을 살아내지 못하는 봄처럼 나를 설득할 수 없다
꽃과 나비가 만나기 위해 다시 멀어져야 했던 그 봄밤처럼 머리와 가슴이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음식이 있어 허기를 배우듯 네가 있어 나를 반복한다
내 모든 기억과 그때가 누구의 것도 아니길 바라며 결핍과 충만 너머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떠나야 한다
들여다보면, 말라가는 너는 민들레 씨앗 같다
초속 40m 강풍 같은 가벼운 현실이 따라나서고 마는 그림자가 된다
윤인미 시인 / 안경
딱 나만큼 안타깝습니다 그 단순함이 쉬워서 겁이 납니다 밖을 내면화하는 데 실패한 꽃잎입니다 왔던 길을 낯설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장밋빛 나를 지나치지 못해 압화 같은 감상에 갇힙니다 이제는 꽃의 환란에 시비 걸지 말고 높고 낮음에 갈증이 없는 한 뼘의 하늘을 담겠습니다
앞서간 길과 지나온 길이 보이지 않도록
윤인미 시인 / 물은 물 밖에서 꼬리가 잡힌다
뒤를 캐다가 앞을 잊었어요 앞을 믿지 않으니 몸이 꼼짝하지 않네요 존재했다는 사실이 달력처럼 쉽게 뜯겼어요 얼굴을 지키기 어려워요 성별에 갇힌 성처럼 지루해요 처음부터 그랬다고 애써서 확신에 갇히고 애쓰지 않아 확신이 절실해요 돌이킬 꿈이 없어요 단독으로 입장을 밝히는 달빛이나 무리 지어 입장을 밝히는 별빛만큼 현재의 입장을 밝혀야 해요 그러나 아무것도 밝힐 수 없네요 산도를 빠져나오고 있는 아이의 머리처럼 불리해요 트라우마가 원동력인 삶처럼 더없이 지극해요 이제 포기할 수 없는 자성自性만 남았네요 믿고 보호받을 수 있는 과거가 필요해요 뒤를 캐다가 뒤를 밟혔어요
-시집, 『채널링』, 시와반시, 2020 에서
윤인미 시인 / 치타
서랍 속 낡은 카메라 몸속에 기억을 묻고 웅크린 채 미동도 없다 피 냄새를 쫓아 심장을 물어뜯던 행적을 뒤로 한 채 깜박깜박 기억을 놓치고 있다 가끔 누군가의 손이 몸을 툭툭 건드리면 마지막 풍경을 언뜻 언뜻 비추다 만다 갈수록 헐거워지는 등뼈 같은 시간 그는 누구를 그리워한 걸까 누가 찾아오길 간절히 기대한 걸까 왕성한 식욕은 검붉게 굳어 있다 누구나 꽉 물어서 더 이상 인화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다 굳어진 지 오래인 그의 입술이 그것을 말하려고 기다린 걸까 조리개를 열어놓은 채, TV 광고를 향해 그가 돌진한다 기록은 추억을 재생한다*
*니콘 카메라 광고용 문구
-<시산맥> 2013년 여름호-
윤인미 시인 / 아트 테라피
여기, 눈으로 볼 수 없어도 그려지는 그림이 있어요
붓끝으로 당신과 나의 마음이 모이면 당신의 인생이 걸어 들어와 우린 그림의 한 가운데 놓이게 되지요
당신의 상처. 그 어디 쯤. 색이 가파르고 위험해 보이는 그곳,
홀로 요동치다 잠잠해지는 그림 속으로 생각보다 먼저 내 손가락이 다가가요 부드럽게 학습된 손가락이 당신에겐 날카로운 창이었나봐요 놀란 당신은 발걸음을 붓대처럼 세우고 걸어가네요
가는 선이 눈보라를 맞으며 힘겹게 고갯마루를 넘어가요 빛깔은 잊고 향기가 비슷한 巖梅, 지금 나는 마음 하나를 꺾어들고 향을 지펴요
당신의 상처 속으로
윤인미 시인 / 혀 1
손으로 얼굴을 괴고 오래도록 당신을 바라봐요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 둘은 너무도 먼 나라의 사람들
익숙해지면 쉽게 오해하는 법, 창문으로 들어와 어디론가 뻗어가는 당신의 언어, 지금 막, 내가 쏟아내는 언어 위에 내려와 앉네요
우리 둘은 너무도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들
조여 오며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당신의 사랑이 섞일 수 없는 내 마음을 지그시 눌러요
포크처럼 포개어져도 나이프처럼 헤어져도 의미 없이 서로 맴도는
당신과 나의 거리는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
그런데 당신의 언어보다 먼저 창을 넘어 온 눈빛은 왜 아직도 제자리에 묶여 있죠
윤인미 시인 / 혀 2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 잘 먹는다 한 통속이다 그녀들 중심에 서면 갇힌 바람이 뼈와 골수를 파먹는 소리가 들린다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으로 읽히는 것을 싫어한다 피었다 지는 꽃처럼 그러나 이름은 서랍 속에 두고 다닌다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의 生을 과녁으로 인식 한다 과녁은 자신의 결핍을 추궁하는 눈빛. 눈빛이 강할수록 입에서 쏟아지는 화살로 심장을 맞힌다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의 봄볕처럼 킥킥 웃는다 웃음소리는 말에 찍힌 신음소리푸성귀 같은 상처가 여기저기서 웃자란다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의 그에 의해서 보호 받는다 대부분의 그는 중요한 순간에 자리에 없다
대부분의 그녀는 대부분의 그녀를 용서해야만 살 수 있다 이름을 호명하며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개괄적으로 용서한다
* 이수명 시인의 『대부분의 그는』에서 빌림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채호기 시인 / 삶은 마술이다 외 6편 (0) | 2026.01.10 |
|---|---|
| 허호석 시인 / 동행 외 6편 (0) | 2026.01.10 |
| 최동은 시인 / 한통속이다 외 6편 (0) | 2026.01.10 |
| 박관서 시인 / 강정 간다 외 6편 (0) | 2026.01.10 |
| 김효순 시인 / 그리운 엄마 외 6편 (0) | 2026.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