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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효순 시인 / 그리운 엄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0.
김효순 시인 / 그리운 엄마

김효순 시인 / 그리운 엄마

 

 

엄마! 하고 불러보면

정갈하고 인자하신 모습이 떠오른다

동백기름에 참빗으로

곱게 곱게 쪽진 머리

여름이면 하얀  모시적삼에

풀 빳빳이 먹여 한껏 맵시내시던

우리 엄마

단 한 번도 엄마의 흐트러진 모습을

난 본 적이 없다

 

사십이 넘어 낳은 막내 딸

행여 불면 꺼질세라

참사랑 듬뿍 받고 자란 나

추운 겨울 학교 갈 때면

아궁이 불에 운동화 쬐어

따뜻하게 신겨주신 엄마

 

비오는 날 학교에 우산 가져오시면

할머니라 놀리는 친구들 소리에

창피해 우산을 집어던졌던 나

그래도 우리 엄만

비만 오면 어김없이 우산을 가지고 오셨다

 

물 한 방울 손에 안 묻히고

사랑만 듬뿍 받았던 막내 딸

그 특권을 내가 다 누렸다

엄마는 음식 솜씨 좋기로도

둘째 가라면 서럽다

여름이면 땀 흘리며 먹던

닭개장 수수부꾸미가 일품이셨던 엄마

유월이 되면 자꾸만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김효순 시인 / 나비와 나방

 

 

밤물결의 향기를 좋아한다는 너도

처음엔 나비였다고 한탄을 했어

밤마다 날개를 접고 더듬이로 기어가다가

온 몸의 뼈마디가 쑤신 동료들끼리 만나서

가로등 아래에서 잠깐 한 눈을 팔다가

이름표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했어

 

잃어버린 한 쪽 날개에 대하여 애통해 하거나

어깨쭉지에 실금이 가서 울먹거리는 나비들에 대하여

낮과 밤을 차별하는 정글의 법칙을 모르는 애송이라고

차마 귓속말을 하겠지

 

너는 나비의 눈물을 보지 못한 척해

나비는 꽃이 되려다 독버섯에 취하거나

여왕벌의 발톱에 숨을 죽이거나

장미가시에 찔리기도 한다는 걸

모를거야.

 

우리의 공통점은 날개가 있다는 것과

더듬이와 페르몬*..그리고

늘 하늘을 동경한다는 거야

또 있어

우리를 세상에 보내 준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우리는 한 핏줄이라고....

 

나는 너를 나비라고 부를 거야

너는 나에게 나방이라고 불러도 좋아

 

나비이거나

나방이거나

우리가 태어난 날부터 사람들은 똑같은 꿈을 시작하지

바다에 갔다가도 하늘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어느 날

우리가 지구 반대편을 돌아와서

낮과 밤이 나란히 베개를 베는 여명의 나라에서

함께 죽는다면

너는 다시 나비로

나는 다시 나방으로 태어나자

 

 


 

 

김효순 시인 / 초록 불빛, 섬

- 위대한 개츠비

 

 

존재와 존재 사이

섬이 있었다

 

영혼과 영혼 사이

난파선이 있었다

 

지구 위를 떠도는 유성들은

바다 멀리 초록 불빛이 깜빡이는

게츠비의 섬을 선망하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섬은 태양신을 섬긴 빙산이었다 한다

 

초록 불빛 때문에 섬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을 때

첫사랑을 닮은 노루새끼와

어린 꽃사슴이 달아났고

태양신은 빙산의 화석이 되었다

 

초록불빛에 눈이 멀어 죽었을 개츠비.

그의 무덤에는

꿈마다 첫사랑이 등대처럼 깜빡거릴 것,

 

개츠비가 황금 모자를 쓰고

태양신의 아들로 돌아올지라도

 

나 역시, 기어이 검푸른 해류를 거슬러 올라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데이지일 것이다.

 

 


 

 

<제43회. 김효순- 시와사람 신인상 당선작>

김효순 시인 / 달팽이와 낙타

 

 

달팽이는 낙타의 등을 타고

고비로 가는 꿈을 꾸었다

낙타가 당나귀에게 사막을 걷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지만

모래구덩이에 빠져죽은 당나귀 보았다

낙타도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진 적이 있다

평생 아랫목에 누워 잠을 잔 적이 없는 낙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는다

오로지 모래폭풍을 지나 오아시스로 가는

지름길을 찾아내는 것만이

제 존재를 규명하는 일이다

 

낙타는 햇살에 멀미를 하면서도

신기루가 허상인지를 체험하고 싶은 달팽이를 만났다

 

모래꽃을 본 적이 없는 달팽는

어린왕자와 사막여우와 어울리는 꿈을 꾸고 싶었다.

눈 먼 세상을 더듬으며 바람의 언덕까지 혼자 올라갔다

그날 밤, 발길질하는 낙타의 발톱 위에서 언뜻 잠이 들었던가

 

눈물의 갑옷으로 지붕을 짓던 달팽이.

별똥별 쏟아지는 사막에서 기적 같은 소나기에

온 몸의 껍질을 벗는 꿈을 꾸었다

사막을 건너 피안의 저쪽,

오아시스로 가는 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달팽이, 낙타와 동행하는 중이다

 

 


 

 

김효순 시인 / 모닝커피를 마시며 똥 이야기를 한다

 

 

장애아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우리는

오늘도 모닝커피를 마시며 똥 이야기를 한다

 

어떤 순례자가 에덴의 천국에서 가져온 향수라고 해도

이 보다 오감을 매혹시킬 수는 없을 것

 

똥ㆍ덩ㆍ어ㆍ리 하나로

아이의 쾌감지수와 불쾌지수를 비교한다

 

때로는 생과 사의 신호등처럼 깜빡거리는 그것을

사랑한다

 

하필 똥구멍까지도 애절했던 아이를 사랑한 적이 있다

 

배설의 축복마저 물려받지 못한 그 아이의 똥구멍에

내 검지를 깊숙이 넣고 똥 덩어리를 꺼내 준 날은

눈물을 흘렸다

 

누가 걸핏하면,

머릿속에 똥만 가득 찬 것들이라고

신성한 하늘에다 삿대질을 하는가

 

함부로“똥ㆍ덩ㆍ어ㆍ리”라고

고상한 입술을 짓이기며 비아냥거리는가

 

우리는 오늘도 똥 이야기를 한다

 

 


 

 

김효순 시인 / 수국꽃 당신

 

 

세상에나, 빈 둥지에 수국으로 오시다니요

그날 밤, 당신의 삼종지도를 기억하는 달빛만

저 혼자 사모곡을 부르고 있었지요.

 

당신이 떠나고 20년,

땡감나무 아래 장독대는

가끔 마른기침을 하는 고양이들만

당신의 박꽃그늘이 그립다 하였지요.

 

어머니

오늘은 당신이 새벽이슬로 바치던

여명의 제단 위에 촛불을 피워놓을까요

오늘따라 수국은 그 촛불의 눈물로

옷고름을 적시겠네요.

 

어머니

수국이 저리 풍만한 젖가슴으로

저희를 보듬어줄 줄 알았다면

그깟 세상의 회초리 따위는

쓰디쓴 보약처럼 질끈 눈감을 걸 그랬어요.

 

철부지 저희는 곳간 열쇠도 잃어버리고

씨간장 항아리도 깨뜨렸고,

헛간에서 흐느끼던 당신의 지팡이도

가뭇없이 쫒아내고 말았어요.

 

어머니 그나저나,

언젠가는 수국으로 돌아온다는

새끼손가락 걸기나 했던가요?

오늘은 저리도 빈 둥지에 수국이 함박 꽃 피우니

집 떠난 텃새와 까치들 돌아오거나,

고양이들 지 새끼 데려와

항아리 사이로 숨바꼭질하거든

 

부디 당신은 보랏빛 수국의

시린 맨발로 오시어도 좋아요.

 

빈 둥지엔 밤새 꺼지지 않을

헛헛한 모닥불을 피워놓겠어요. 어머니

 

 


 

 

김효순 시인 / 상상임신하는 여자

 

 

그대와 나

기적의 쓴 약을 먹고 나란히 누워

양수가 범람하여 붉은빛 지느러미 반짝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 잉태할 수 있다면  

 

지난 밤 그대와

신비의 씨앗 반쪽 씩 갖고 싶었어요

꼭 열 달동안만, 아니 석 달 열흘만이라도

내 뱃속에 키우고 싶었지요

 

신화의 주인공처럼

달빛을 마시고 별을 따주며

서로 밧줄로 묶어 천둥번개 치는 날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다시 한 번, 둥지에 올라

따뜻한 알을 낳겠어요

하늘 문 열고 천사가

핏덩이 하나 심어줄 때까지

사랑과 영혼이 꿈틀거리는

결실을 기다릴거예요

 

오늘 밤도 나는

배가 불러오고 헛구역질을 하고 싶어서

꽃무늬 흐드러진 임부복을 입고 잘 거예요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울다가 잠이 드는 날에도

홀로 만삭의 배를 쓰다듬는 꿈을 꿀 거예요.

 

 


 

김효순 시인

2000년 <한맥문학> 등단. 시집 『사는 동안 』,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