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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혜 시인(춘순) / 부재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0.
김지혜(춘순) 시인 / 부재

김지혜(춘순) 시인 / 부재

 

 

어두워지는 골목 앞에 나와 앉은 노파를 나는 지나쳐간다

속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쭈그린 요지부동을 나는 흘깃거린다

저렇게 쭈그리고 앉아 구겨진 모시바람으로 맞이하는 이 누구일까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저 어둠 끝에서 누가 실마리처럼 온다는 것일까

콘크리트 골격을 잘못 뚫고 나온 철근처럼 대문 앞 층계에서 휘어 있는

노파는 잠든 것일까 죽어버린 것일까 저 미동 없는 짐승

저 휘어져 끝이 없는

골목, 늑골 깊숙한 환부에서 몰려오는 바람이 나를 관통하고

구겨져 스멀거리는 노파의 모시자락 훑고 빠져나갈 때

진저리치며 슴벅거리는 두 눈은 분명 노파의 것이 아니고

아니고 짐승이고 허깨비이고 하룻밤 악몽일 뿐

등줄기 위로 싸늘히 흘러내리는 한기

뒤돌아보니 노파도 골목도 어둠도 사라지고 없다

없다 망부석처럼 앉아 잴잴 침 흘리던 요지부동

없다, 늙은 암캐처럼 미동 없던 두 눈

 

헛것이 날 바라보고 있다.

 

-시집 <오, 그남자가 입을 벌리면>에서

 

 


 

 

김지혜(춘순) 시인 / 가수는 천국의 계단을 노래하고

 

 

왕십리를 지나고 있다 단란주점 女心의 문이

비끗 열려 있다 홀내를 가득 채운 홍등의 불쾌한 눈빛이

초췌하다 거리로 몰려나온 술꾼들 뒤룩한 뱃살 근처에

드럼이 있다 둥둥둥둥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저 먼 나라의 가수여 '그녀는 왜 늘 닫혀 있는가

왜 거기에 없는가' 울부짖는 가수여 사람들은 저마다

뱃속에 자작나무로 둘러친 질긴 울음보를 품고 있어

이 밤에도 미친 듯 기어를 끌어당긴다 밤의 내밀한 속살을 뚫고

배추 썩는 냄새 진동하는 새벽시장을 지나 고가를 타고 넘어

시속 수천만 년의 속도로 이 어두컴컴한 세상의 기계를

통과하고 있다 둥둥둥둥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그녀와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그녀를 부르짖는 가수와

족쇄 같은 넥타이에 질질 끌려 어디론가 흩어지는 술꾼들

차례차례 꺼지는 간판과 차례차례 휘청거리는 가로수

멀리 강이 돌아눕고 아차산 관악산 북한산이 끄응, 신음한다

언젠가 한날한시에 완성될 이 밤의 완벽한 퍼즐판이여

지금 조각들은 엇박자로 돌아가고 있다 쉴 새 없이 끊임없이

어쩔 수 없이 왕십리를 지나고 있다 왕십리를 지나쳤다

왕십리를 지나칠 것이다 노래하는 가수여 노래하는......

 

-시집 <오, 그남자가 입을 벌리면>에서

 

 


 

 

김지혜 시인(춘순) / 아내의 밥상

 

 

출장지에서 앞당겨 집에 왔더니

아내 혼자 밥을 먹고 있다

놀라 얼른 감춘 밥상 위

맨밥에 달랑 김치 몇 조각

어머, 예고도 없이 벌써 왔어요

당신이 없으면 반찬걱정을 안해 대충 먹어요

김치 국물이 해일처럼

와락 내 허파로 쏟아지는 저녁

 

 


 

 

김지혜(춘순) 시인 / 싹

 

 

한 계절이 가고 한 계절이 오는 사이

비닐봉지 안 감자들은 서로를 억세게 부둥켜안았다

어른 손가락만큼 자라난 독(毒)줄기로 전생까지 끈끈히 묶었다

물컹한 사체에서 기어나와 처절히 흔들리는

 

아직 나 죽지 않았소, 우리 아직 살아 있소

생명 다한 모체를 필사적으로 파먹으며

비닐봉지 안의 습기와 암흑을 생식하며

저 언어들은 푸르게 살아남았다

 

싹 난 감자알을 창가에 올려놓으며

본다, 한 계절이 가고 한 계절이 오는 사이

나를 비켜간 저 푸른 인연의 독(毒)

 

-문학과창작 (2005년 가을호)

 

 


 

 

김지혜(춘순) 시인 / 우물에 대하여

 

 

 음지 깊숙한 곳에 물이 흘러와 고인다 물은 여자가 흐느낀 시간, 시간이 흘러와 고인다 고여 깊어진다 시간은 콜타르를 칠한 벽처럼 고요하다 그 벽에서 기적처럼 만삭의 달이 둥실 떠오른다 수면 밑에서 달이 빙그레 웃는다 달이 숨쉴 때마다 여자가 사과처럼 웃으며 흔들린다 그러나 그대, 기어코 탐욕스러운 손아귀를 밀어 넣는다 달을 거칠게 움켜쥔다 여자의 심층이 뿌리부터 요동친다 조금만 더 들어온다면 죽여버릴 테야 그러나 그대, 달을 움켜쥔 그대가 이젠 시간이다 그대의 억센 힘이 달을 일그러뜨린다 여자가 파닥파닥 몸을 뒤튼다 우물이 덜컹거린다 시간의 물이 주워 담을 수 없는 속도로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그대 손아귀에 쥐어졌던 달이 온데간데없다 달이 사라지자마자 그대의 손이 뼈를 드러내며 타들어간다 여자가 고사목 음색으로 낄낄거린다 다 죽여버릴 테야 여자의 아랫도리가 삽시간에 뻣뻣해진다 우물이 강퍅한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달도 손아귀도 요동도 없는 바닥, 시커먼 짐승 한 마리 가만히 누워 있다 그 짐승이 다리를 벌리자 이윽고 물이, 물이 차오른다

 

 


 

 

김지혜(춘순) 시인 /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2011 국제신문신춘문예시 당선작

 

 


 

김지혜 시인(춘순)

1952년 강원도 춘천 출생. 본명: 김춘순. 필명: 김춘리. 수원여대 졸업. 사회복지사.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12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2년도 천강문학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