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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서 시인 / 강정 간다
강정에 간다 형과 형수와 아내와 딸과 함께 여름휴가 삼아 배를 타고 뒤늦게 신혼여행 왔던 제주도 아름다운 바닷마을 태풍에 흔들리는
강정에 간다 부끄러움으로 간다 총칼 난무하는 곳도 아니고 국경을 넘나드는 싸움터도 아닌 시골마을 하나 지키자는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강정에 간다 갓난아이를 안고 폭설 속에 목숨을 다한 미이라가 되어 역사와 전설로 남아 있는 사람의 체온을 찾아 강정에 간다 따순 피가 흐르는 형과 형수와 아내와 딸을 만나러 나는 오늘도 부끄럽게 부끄럽지 않게 강정에 간다
박관서 시인 / 가거도行
밀려난 꿈은 가장자리가 가장 깊다 사는 일에 목을 걸고 맴을 돌다 국토의 맨 끝 가거도에 이르러 이웃 나라 닭 울음에 귀 기울이고 있는 녹섬 앞 둥구회집 평상에 앉아 검정 보리술로 목을 헹구면 박혀 있던 낚시미늘마저 따뜻해진다 밤 깊은 동개해변 찰랑거리는 둥근 달빛에 젖어 흠뻑 사는 일 흔적도 없이 지워져 남의 나라 남의 일이 될 즈음에야 새로워진 나를 만난다 스스로 깊어진 가장자리를 만난다 생무릎 꺾여 밀려나보지 않은 이들은 평생을 살아도 가거도에는 이르지 못하리
박관서 시인 / 기차를 기다리며
멀리 불빛을 보네 외딴 전철기 막사에 앉아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네 풀벌레 울음 가슴을 치네 에이 몹쓸 것, 뜯어내어 풀어주네 수풀 밭으로 낮에는 소주를 마셨네 작업복에 담겨 평생을 철길 아래 침목으로 누워 기차를 기다리는 동료들 슬슬 꼬드겨 한 컵 가득 소주를 마셨네 모처럼 수은 불빛으로 타올랐네 흐린 낯빛으로 낮게 깔린 기름 먹은 하늘을 불러 모아 스파이크 대못으로 쾅 쾅 두드려 박았네 한 치의 틈도 없이 서로를 결박하였네 그제야 삼천오백만 육십 킬로를 달려온 밤 기차가 지나갔네 천둥처럼 소문처럼 깜박 깜박 별들이 솟아올랐네
박관서 시인 / 송별식
불현듯 날아온 전보 한 장에 퇴직을 삼 개월 앞둔 그가 짐을 싼다 쏟아져 나오는 사물함을 뒤지다가 이제는 쓸 일 없을 겨울 털모자와 잘 빨아서 입으라며 참 따뜻하며 동절용 작업복도 함께 던져준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 가까웠던 것일까 떠나김을 준비하는 그는 말이 없고 지켜보는 우리들도 말이 없다 하루 내 오고가는 열차의 꽁무니에 뒤엉켜 철없이 피어난 찔레꽃처럼 흔들릴 뿐
야근을 마친 아침 퇴근길에야 우리들은 기운 햇살 줄줄이 스며드는 역전 골목 함바집 뒷방에 모여 보글대는 곱창전골로 송별식을 한다 서로가 빈속인지라 몇 잔의 선술에도 불기둥이 서고 눈자위와 귓불에도 금방 꽃물이 든다 그러하다 선로변에 뼈를 묻은 우리들 어디에서 어디로 뒹군들 선로 위를 흐르는 기적에 가는 귀 먹는 일 아니랴 몸으로 뒤섞여 한 세상 엮어가는 우리들 부드럽게 달라붙는 연결기처럼 모두 뜨겁고 깊은 송별주를 나누자, 건배!!
박관서 시인 / ‘영광신문’ 창간 25주년에 붙여
사람이 하늘인 세상입니다 진즉부터, 영광은 사람이 하늘이었습니다
서남해 푸른 바닷바람을 받아안아 대륙을 향하여 불갑산 모악산을 거쳐 마라난타 존자의 말씀으로 빛으로 사람이 가져야 할 사랑과 평화와 공생의 씨앗을 한반도에 뿌렸습니다
하늘 아비의 기상과 땅에서 난 어미의 숨결을 처음으로 받아들여 천년의 눈을 뜬 영광은 한반도의 배꼽이었습니다 배꼽이 아프면 온몸이 아프고 배꼽이 편안하면 모두가 편안합니다
그리하여 법성포였고 그리하여 불갑사와 소태산 대종사의 정신으로 세상을 개벽하였습니다 신령스러운 햇살이 황금 조기떼의 등비늘로 빛났습니다 굽히지 않아 속을 비운 뼈와 마른 살로
만민 창생의 생생한 삶을 정론직필의 필대로 삼아 눈 밝은 이야기와 숨결들로 실어날랐습니다 영광신문 25년은 그렇게 찰나의 순간으로 천년을 건너는 公無渡河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언론은 사람에게 핏줄입니다 백년 천년, 영광에서 사람의 핏줄입니다
박관서 시인 / 애기동백
여가 남녘이라는 그대들
붉디붉다는 그대들
휘뚝, 목이 떨어져서야 흐린 땅에서 꽃으로 벙그러지는 그대들
꽃잎삭 떼어 막걸리잔에 띄워놓고 보고 잡던 처자의 손가락으로 흘훌 저어 달래는 그대들
여수든 목포든 무안 촌구석 망운이나 현경 어름 바닷가 황량한 김발대로 머리채를 푸는 그대들
양재기로 얼굴을 덮어 차마 들이켜 마시며 도리없이 일찍 돌아간 벗을 떠올리는 겨울날의 그대들
아흐, 금세 불을 켜는 그대들
삼백오십만년의 동굴에서 얇은 눈을 뜨는 그대들의 마음으로 깃드는 실선의 그대들
허무가 나의 것인 그대들
여가 그대인 그대들
박관서 시인 / 순천만 갈대밭에서
갈대가 속으로 운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오랜 세월 반도의 맨 남단 홀로된 누이의 속곳처럼 바람에 잠겨 있는 순천만 갈대밭에 서보면 안다 함부로 꽃은커녕 싹도 피우지 않는 긴 세월 짜디짠 포구에 뿌리를 내려 수시로 몰려드는 바람에 맞서 우- 우- 마른 어깨에 어깨를 걸고 아직까지 내지르는 함성 속에 서보면 안다
갈대는 속으로 울지 않는다 오래된 연인들 누구나 그렇듯이 함부로 울지 않고 함부로 웃지 않으며 서로의 팔뚝 맞잡고 끊임없이 제 길을 가는 것이다 어디 천하의 후진국 쓸개 없는 시인들 몇몇이 달려들어 일어서라 나아가라 쓰러져라 앞장서다가 홀로 제 풀에 지쳐 사라지며 내지르는 중얼거림일 뿐
어디 긴 세월 한 세상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쓰러진들 무너진들, 아니 한 줌 초개처럼 사라진다 한들 속으로 우는 것을 보았는가 흔들리는 얼굴로 한탄하는 것을 보았는가 웃기지 마라 우는 것은 속으로 속으로 우는 것은 제 가슴속에 닭벼슬 하나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못난 시인들의 노래일 뿐
한때의 순연한 바람과 산들거리는 실루엣 속으로 칸나처럼 깃들었다 이내 불어 닥치는 어둡고 습한 바람에 치여 갈대밭을 떠나는 여름철새들이 목을 꺾으며 하늘 높은 데서 저 홀로 끼룩대는 울음일 뿐,
갈대는 말이지 한 계절이 바꿔 목에 칼이 들어온대도 공허한 하늘로 날아올라 스스로 우는 헛된 꿈은 꾸지 않아 시인이든 무지렁이 필부든 순천만 갈대밭에 서보면 알아
오랜 세월을 하루같이 우- 우- 메마른 어깨에 어깨를 걸고 말없이 한세상 끝끝내 지켜내는 게 누구인지 진정 누구의 피눈물인지 갈대가 속으로 운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우리의 근대사처럼 꽃처럼 시처럼 노래하는 그대들 시인들, 천년의 함성 너머 눈멀고 귀먹은 부끄러운 노래들은 알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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