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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동은 시인 / 한통속이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0.
최동은 시인 / 한통속이다

최동은 시인 / 한통속이다

 

 

꼬리가 꼬리를 휘감고 머리와 머리를 부딪고 기어오르다 나자빠지고 밑에 깔리고

다시 어떤 놈의 모가지 위로 올라타고 미끄러지고…

뼈가 없는 듯 몸을 동그랗게 말아넣는 놈 다른 놈의 아랫도리를 파고들다 꼬리에

얻어터지는 놈 머리를 쑤셔박고 잠시도 쉬지 않는 놈 끝내 거품을 물고 달겨드는

놈 그 위에 소금이 뿌려진다

 

원주 추어탕집 앞 붉은 고무통 가득 담겨있던 미꾸라지들 튀어나온 한 마리

땅 위를 기어간다 추어탕집 남자 얼른 달려와 통속에 집어넣는다 미꾸라지 다시

한통속이다

 

-『애지』 2006년 가을호

 

 


 

 

최동은 시인 / 그것들

 

 

나무를 지우고 숲을 지우고 마을을 지우며 내려왔지

노을을 지우고 온갖 그림자를 지우고 새들의 길을 지우며 내려왔지

산의 나무들이 이마와 이마를 맞대고 촘촘해지는 동안

노을 속 이파리들이 느린 걸음으로 걸어왔지

능선을 넘어 온 안개가 젖은 발을 감추고

숲의 등을 밀며 아주 조금씩 걸어왔지

산책 나왔던 것들 뒤꿈치가 붉어져 돌아가고

햇볕에 익은 무덤이 온전히 어둠으로 잠기어가고

바위 덩어리 같은 고요가 폭포 소리로 오는 것이었지

들판과 언덕과 저녁의 키가 수평을 이루며 낮아지고

팽팽하던 저수지의 중심이

줄지어 돌아가는 오리의 중심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지

내가 그것들의 본래 색깔을 더듬어보는 동안

 

 


 

 

최동은 시인 / 벚나무 정류장

 

 

나, 언젠가 벚나무 정류장에 내렸었네

내 손금 위에 꽃가루 뿌리며

벚나무 한 그루 내게 수작을 걸었네

나, 그때 꽃 못 본 척 길을 내주었네

그는 내 머리에 화관을 씌우고 꽃신을 신겼네

어지러워 어지러워

나, 그의 그늘 아래 쓰러졌네

굵은 밑동 아래 신발 가지런히 벗어두고

햇볕 좋은 날 뻥튀기 하며 놀았네

가지마다 팡팡 새끼들을 튀겨냈네

그것들 높이 높이 튀어 올랐네

눈이 부셨네

흰구름 따라 바람에 날려가는 꽃잎, 꽃잎들

나, 그 밑에 누워 떠나가는 그것들을 바라보았네

잠깐이었네

 

-애지 (2006년 가을호)

 

 


 

 

최동은 시인 / 나는 죽었다

 

 

무시무시한 개에 물려 죽었고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

나를 밟고 간 자동차는 오늘도 달린다

흙 속 곰팡이 균이 내 몸에 퍼졌고

그 위에 호박꽃이 피었다

 

스무 살 때는 다리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다리 아래가 낭떠러지인 줄 몰랐다

그가 떠밀었다는 걸 죽고 나서 알았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던 밤

갑자기 한기가 들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죽었다

 

침대 옆 시계는 째깍거리고 핸드폰은 울다 지치고 터치 등은 오래 켜져 있었다

 

어느 화장터로 가야 할지

유골함을 받아들고

배롱나무 이파리에게 가는 길을 물었다

주검을 안고 공원을 몇 바퀴 더 돌았다

 

어제 받은 택배도

몰래 버리고 온 쓰레기도

죽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시집 『한 사흘은 수천 년이고』에서

 

 


 

 

최동은 시인 / 나일강 투어

 

 

한 사흘 밤낮을 당신을 따라 흘렀지요

당신 몸 냄새로 머리카락을 적시고

당신 배위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오줌을 누고 꿈을 꾸었지요

뜨거운 아침 햇살에 손을 적시며

당신 가슴으로 흘렀지요

당신이 둑을 무너뜨리고 범람할 때

나도 굽이치며 범람 했지요

시꺼멓게 기름진 땅에 배추를 심고

파도 심고 양들을 기르며 흘렀지요

푸른 풀밭에서 뒹굴고 올리브나무

밑에서 당신 닮은 아이를 낳으며

당신과 흘렀지요

파피루스 우거진 강기슭에서 한 남자가

작은 배를 타고 고기를 잡고 있었지요

곱슬머리 아이가 토속 인형을 팔았지요

태양신 부적을 목에 걸고 주문을 외며 흘렀지요

낯선 남자 팔에 안겨 춤추며 흘렀지요

황금색 태양을 향해 두 팔 벌리고

당신 눈 속으로 흘렀지요

때로 잔잔한 물결 위에서 노래 부를 때

왜 알 수없는 슬픔이 차올랐을까요

그때 캄캄하게 그믐달빛이 흘러들고

당신 가슴에 눈물 쏟았을까요

한 사흘은 길고 한 사흘은 짧고

한 사흘은 수천 년이고

 

- 시집 『한 사흘은 수천 년이고』파란, 2021

 

 


 

 

최동은 시인 / 무대

 

하얗게 꺼지지 않는 불빛이에요 밤에도

낮에도 종일켜 있는, 밤벚꽃이라네요

단 며칠이란 걸 알지요 속아 넘어가려고

자꾸 쳐다보지요

사진을 찍으면 뭐해요 꽃이 지기도 전에

지울 텐데 가지를 잡고 환하게 웃고 있는 당신을,

환하게 내려다보는 저꽃잎들은 눈동자가 없어요

한나절이 텅 비어 있어요

그래도 웃어요 당신은 속으면서 웃어요

쏟아져요 하얗게, 꽃잎들이 날려요

날려 가요 운동장으로 냇물 위로

누군가의 무덤 위로 모자 위로 회오리바람 속으로

당신은 남아 있지요

가지 하나를 꼭 잡고 당신만 남아있지요

주변엔 아무도 없어요 웃고 떠들던

관객들이 모두 사라졌나요 장면 하나가 사라졌나요

주인공은 누구였나요

당신, 또 속았군요 입을 헤 벌리고

당했군요 일 년 전에도 삼십 년 전에도 그렇게………

꽃 속이 허공이란 걸

알면서도 속고 속아서 살았다고요

변명하지 말아요 살아 있어서 속은 거잖아요

 

 


 

 

최동은 시인 / 레바논 감정이 나를

 

 

금간 식탁에 앉아

최정례 시인의 시집 ‘레바논 감정’을 읽는다

막내아들은 제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이 순간, 레바논 감정은 레바논 감정이고

내 감정은 내 감정이고

아들은 휴학을 하고 게임중독자가 되고

시도 안 읽히는 어두운 대낮

열흘째 계속되는 장마는

천둥과 벼락을 끌고 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아들은 게임 속에서 계속 낄낄거리고

난 치밀어오르는 속을 꾹꾹 누르고

빗물은 TV속에서 둑을 무너뜨리고 집을 쓸어내리고

아들은 자기편이 이겼다고 낄낄거리며

막간을 이용하여 빵과 우유를 챙겨들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고

잔소리는 반복되고

레바논 감정은 더 부글부글 끓고

장마는 하염없이 북상중이고

이 시는 왜 이렇게 어려운거야

읽은 곳을 몇 번씩 다시 읽고

아들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한 판 더하자고 내기를 하고

빗줄기는 마왕처럼 창문을 두드리고

몇 페이지인가,

“오토바이가 커다란 화한을 싣고 가고 있었다

달려가고 있었다*”를

나는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가고 있다

꽃도 없는 사막으로’ 라고 읽다가

아들놈의 굳게 잠긴 문을 쳐부술 생각으로 골똘하고

 

*최정례의 시 ‘달려가는 꽃나무’ 중에서

 

 


 

최동은 시인

경기도 광주 출생.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에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전문가과정. 2002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술래> <한 사흘은 수천 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