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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채호기 시인 / 삶은 마술이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0.
채호기 시인 / 삶은 마술이다

채호기 시인 / 삶은 마술이다

 

 

영혼은 무엇일까? 달아나는 것.

접근하면 달아나는 고양이.

자기 자신에 대한 수학적인 저항.

인간 앞에 앉아 구석구석

신중하게 털을 핥아내는 고양이.

 

단순한 일상이 사라져가는 광기.

일상의 그 완고함을 다시 보여준다는

마술은 참으로 섬뜩한 키스군.

매혹적이고 순수한 소문. 이름 없는 물결.

 

마치 전신 교신을 하듯

그녀의 상상력을 놀랍도록 휘어잡았다.

그녀의 정신과 아름다움을 존경했다.

그녀가 사나워질 때 얼마나 아름다운가.

 

함께 풍경을 보며 서 있었다.

아름다움이 풍경을 담은 긴 눈꼬리로 그를 찔렀다.

그녀가 말했다. 마술은 거짓이에요.

단 한 번의 눈짓과도 같이 음악은 사라졌다.

삶은 마술이다.

 

 


 

 

채호기 시인 / 건널목

 

 

 철로가 있다. 아득히 사라져가는 철로의 숨막힘이, 철로를 지피는 뙤약볕의 긴장이 있다.

 레일이 비어 있어 한낮 햇빛의 혓바 닥이 두 가닥 철뼈를 핥아 녹여버렸으면.......

 하지만 철로엔 항상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바퀴가 있다.

 

 너의 몸은 여전히 철로 건너편에 있고, 욕망만이 초점 흐릿한 사진처럼 무서운 속도에 실려 흐른다

 (욕망이 기차보다 빠르다면 건너갈 수 있으련만).

 

 내가 너에게 가려면 매번 달리는 기차를 건너가야 한다.

 나는 달리는 차창에 수도 없이, 달려드는 나를 비춰볼 뿐.

 너와 내가 숨가쁘게 달리고 있는 건널목에 밤거리처럼 요란한 기적이 한순간 정지 화면처럼 이 生의 필름을 차단시킨다.

 

 여전히 철로 건너편에서 너의 몸은; 동공의 수축과 속눈썹의 떨림,

 긴장하고 있는 안면 세포의 쏠림, 낮고 가는 소리를 부리는 성대의 진동,

 제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손가락, 자학하는 발끝으로, 手話 같은 언어를 내게 비췄다.

 이윽고 그 조명이 달리는 기차에 굴절되며 건널목을 건널 때,

 나는 암흑 속에 백지처럼 서 있었다.

 

 


 

 

채호기 시인 / 질 수밖에 없는 레슬링

 

 

흔적일 뿐인 글자에서 그는 흘러나온다.

사실, 그가 흘러나온 게 아니라, 처음에

얼룩이 번진다, 심장 덩어리의 붉은 얼룩?

절단면이 뭉툭한 푸줏간의 선홍색 고깃자루?

노란 알전구와 빛의 원추형 입방체? 그 이전의

무엇, 알 수 없는, 그녀를 붙잡는 번짐, 얼룩,

흔들림, 진동....... 이게 다 우연일까? 그녀는

스위치가 있다는 것도, 작동한다는 것도, 켤 줄도

알고 있다. 스위치를 올리면 글자에서 무언가

흘러나오리란 것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 생각에, 글자에서 그가 흘러나온 것은

아무래도 우연이다. 그가 그녀 생각 속의 그와

너무나 달라 그를 알아볼 수 없었고 오물거리는

글자들이 그녀를 사로잡았지만, 그것들―찢어질

듯 팽팽히 잡아당긴 살빛 껍질, 팔 다리 머리

몸통을 마구 구긴 살덩이, 내장이 뒤엉킨 쥐어짠

감정걸레, 축축한 그림자를 늘어뜨린 축 늘어진

불알—속에서 그녀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들에 미세하게

그녀의 흔적이 들어 있다. 그녀 생각 속에,

검게 지운 흔적처럼 지우고 뭉갠, 그의 감정과

행동 들이 그의 기괴함의 정체. 매일 밤

그녀가 치르는 악몽은 그녀가 질 수밖에 없는

그와의 레슬링, 빠져나갈 수 없는 링 안에서

그녀는 붉은 살덩이에 짓눌리고, 일그러진

불안에 사지가 졸린다. 매번 그녀의 사타구니에서

그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라는 그녀 생각의

짓뭉갠 검은 얼룩에서 그는 재빨리 흘러나와

글자의 검은 흔적 틈새로 얼른 숨어든다. 마치

그다음에 그녀가 읽을 글자들이 그것이란 걸

미리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채호기 시인 / 먼지의 정물

 

 

걸레로 먼지를 닦으려던 그가

먼지들 속에 먼지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목소리가 아닌 입김 같은 것이었다

밖으로 내뱉는 것이 아닌

차라리 안으로 말리는 들숨이었다

 

그렇게 먼지는 그의 안으로 들어가

그는 먼지가 되었다

 

저물녘, 먼지의 잔상으로 남는 침묵

 

 


 

 

채호기 시인 / 사막을 걷는다

 

 

...그리하여

사막에서 걷고 있다

해는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고

밤도 낮도 아닌 희부연 하늘이다.

눈앞에는 아득한 지평선, 발 앞에서

그곳까지는 비슷한 높이의 구릉들이 솟았다

꺼졌다 하며 첩첩 층을 이룬다

 

좌우로 눈을 돌리고 뒤를 돌아다봐도

거의 같은 공간이어서 몸의 방향을

바꾸었는지 아닌지....

마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주를 거리고 있는

지평선이 시시각각 바깥으로

퍼져나가는것은 아닌지

 

걷고 걸어도 지평선은 그 자리에

그대로다. 걸을 때마다 모래는

부드럽게 발을 덮고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지나온 발자국은 모래 위에

파동을 그렸다가 흔적없이 사라진다

 

사막을 걷는다. 걷고 있는 것인가?

구릉을 올랐다 내려가고 올랐다 내려가고

걷고 있는 것인가? 멀리 아스라한 지평선

멀어지는 지평선은 거기 있는데 헤어날 수

없는 막막함은 지금 여기 있다

 

 


 

 

채호기 시인 / 창문

 

 

어떤 문장은 출입구 없이

창문만 있는 좁은 방.

그 창문에서 그대가 내다보는 것을

오후의 햇빛이 지켜보았지.

 

그녀가 문장을 읽을 때

그대는 유리창에 어른거리네.

창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는

그대는 사라지는 그녀의 현기증.

 

어떤 문장은 창문만 있는

실내가 없는 반지.

아무도 보지 않아도 그대는

그녀의 손가락에 매달리지.

 

창문을 봉해버린 집,

더 이상 그녀가 읽지 않아도

그대는 보이지 않게 홀로 검은

출입구 없는 침묵의 돌.

 

 


 

 

채호기 시인 /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나는 내가 밭에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음이 나를

찾아오기를 바란다. 죽음에 무심할 때, 그러니까 죽음 보다는

아직 완성이 덜 된 내 정원을 더 생각하고 있을 때,

그럴 때 죽음이 나를 찾아왔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한 철학자 친구는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라고

틈만 나면 설파한다. 그래서 그 친구는

신문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정성들여 읽는 기사가 부고 란이라고 말한다.

그래, 맞아.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지.

죽음을 떠올리면 누구나 겸손해질 수 있고,

죽음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죽음에 가까이 간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우정이고 사랑이지.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지만

아무도 죽음을 입고 출근하지 않고

아무도 죽음과 얘기하면서 밥 먹지 않고

아무도 죽음이 보는 앞에서 섹스하지 않고

아무도 죽음 옆에서 잠이 들고 죽음 옆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심각하게 아프고 절망하더라도 죽음보다는

어떻게 하면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느라 고통스럽다.

자살을 결심할 때조차 죽음과는 조금도 친숙하지 않다.

내가 자전거 여행 때 만난 한 할머니는,

사실 면전에서 그녀를 할머니라고 부르면 결례일 것 같다.

올해 여든여덟의 그녀는 검은 선글라스에다

붉게 물들인 머리에 헬멧을 쓰고

자전거로 하루에 백 킬로를 달린다.

어떻게 그렇게 정정하세요, 했더니

댁도 정정한데 왜 내게 묻느냐고 한다.

나이는 잊고 살아요, 한다.

당연히 죽음도 잊고 살죠, 하며

입가에 애교 있는 미소를 띠운다.

그때 하필 내 철학자 친구는 옆에 없었다.

일 년 전 자전거 타다 부러진, 오른쪽 쇄골에 박아놓은

철 핀 제거 수술 날짜를 받아놓은 터라

이번 자전거 여행에는 아쉽게도 빠졌다.

 

 


 

채호기 시인

1957년 대구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대전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1988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 『지독한 사랑』 『수련』 『손가락이 뜨겁다』 『줄무늬 비닐 커튼』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등이 있음. 제 21회 김수영문학상과 제8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 문학과지성사 편집장 및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 역임.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