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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갑 시인 / 팽팽한 힘
아귀의 힘으로 펼쳐낸 잎새들 훌훌 날아간 뒤 냉정한 바람의 손과 결탁하는 동안 허공에 그어진 나무의 손금을 보았지 제 스스로 제 길을 가는 듯했지만 수생목(水生木)이었지
잡다하게 얽힌 잔가지들이 다사다난한 수상인 듯 어지러운 세상을 보는 것 같아 다리까지 후들거렸지 느닷없는 계절의 순환에 순응하기 버거워 설레설레 손 흔드는 나무의 운명이었던가
무성했던 잎새들 발자국마다 어두운 그림자 드리운 채 산 너머 청제*를 바라보는 눈빛 그윽한데 살을 에는 한파에 다듬어진 날렵한 손가락으로 언제 낭창낭창 물오른 바람의 현을 튕기겠는가
지난여름 녹음에 두었던 신록 한 켠 뽑아내려는지 푸렁푸렁 손가락 끝에 걸린 팽팽한 긴장 불현듯 햇볕에 그을린 삭정이 물고 온 까치 한 마리 서슴없이 생목에 뻗칠 생명선의 접합을 물어본다
* 오행설에서 봄은 청색에 해당된다,는 데서 온 말로서 봄을 맡았다고 하는 동쪽의 가상적인 귀신
-시집 『바지락 나비』에서
차의갑 시인 / 가시연
연못가 탐스러운 가시연꽃
꺾으려다 가시에 찔렸다
손가락에서 핀 시뻘건 가시의 꽃
탐하려다 일침에 가시적 양심을 본다
가시방석에 앉아 세상 이치를 깨달으며
가시밭길 걸어
가시없는 삶을 찾아간다
가시연에서는
청개구리도 참회하는 중이다
차의갑 시인 / 가랑잎 엽서 나무들은 우주와 햇빛의 말씀을 듣느라 귀란귀란 봄부터 그리 많은 촉을 세웠나 보다 잎잎으로 퍼지는 무성한 말들 밤마다 별빛으로 채색하고 달빛으로 다듬었다 청정한 나무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잎맥의 문자로 봉인된 엽서 도르르 말린 단풍들은 냉랭한 바람의 손에 들려 각양각색의 모양과 문양으로 제 주소 찾아 가겠지만 맆피쉬와 가랑잎나비의 엽서에는 무슨 말을 새겼을까 골똘한 생각에 잠겨 나무의 연혁을 더듬어 본다 수억 년 전 나무들은 거센 물결을 가르던 물고기였던가 훨훨 허공을 날아다니던 나비였던가 우수수 뒷덜미 때리고 가는 날갯짓소리 저마다 고요히 회귀하는 물결 소리 먹먹한 귓전을 울리며 바스라지는 가랑잎 엽서에는 바람의 물로 흘러가라는 투명한 말씀이 적혀 있다
-시집 『바지락 나비』에서
차의갑 시인 / 걸레의 질감
스스로 찾아가는 후미진 자리마다 그 행적을 품으로 받아들이겠다 제 몸으로 더럽힌 물마저 흡수할 질긴 신념으로 본능을 과시하겠다 반질반질한 사기그릇의 비위나 맞추며 주둥이 닦아주는 행주이거나 겉으로 말쑥하게 목욕재계한 알몸이나 슬쩍 흠쳐내는 수건들을 경계하겠다 거품 잔뜩 물고 거한 거짓 닦아주는 손수건의 행태는 더더욱 멀리하겠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질펀한 밑구멍들이나 보듬어 주는 막걸레의 길을 고수하겠다 오직 순수한 순면의 질을 내세워 오랜 숙련으로 길난 기법을 구사하겠다 건조대에 걸려 있는 걸레의 이름으로 성스럽게 펼친 질감을 보여주겠다
차의갑 시인 / 둥근 푸대접 살아갈 계획을 짜고 짜다가 어둠의 솔기 터진 새벽, 터진 치약 튜브 찢는 허한 심기로 의치 악물고 날품팔이 긴 의자에 진열되었다 차곡차곡 밟아 오르던 네모반듯한 계단들 새로운 엘리베이터 속도에 발목 잡혀 내려앉았던가 툭툭 쪼르륵쪼르륵 속도가 시간을 추월한 계단도 단계도 없는 지하인력시장 간간 모닝커피 빠지는 속 쓰린 소리가 들린다 비릿한 냄새 나는 촘촘히 박힌 사각의 방 드문드문 싱싱하고 통통한 것들만 한 줌씩 뽑혀나간다 뜸하게 걸려오는 전화벨소리에 놀라 검은 고개 꺾은 채 발길 돌리는 아침나절 지하인력시장 파한 김에 내밀려 해장국 앞에 앉은 사내들, 매운 세월 툭툭 털어 넣고 휘휘 저을 때 둥근 빈 푸대접 위로 두덩실 환한 해가 뜬다
차의갑 시인 / 두루마리
뒤를 보다가 화장지를 당겨본다 어이없는 생의 테이프를 재생하는 겹겹이 싸인 동심원의 테두리
문득 낡은 먼지가 후르르 쏟아진다 두루 살피지 못한 날들의 궤적을 따라 둘둘 감긴 영사 테이프를 돌린다
낯 뜨거운 면면을 풀어내어 줄줄이 삭제하고 점점이 잘라낸다 풀려나간 길이만큼 가벼워지는 몸
후미진 자리 찾아가는 두루마리 본원으로 뒹굴던 텅 빈 몸통에서는 깊고 고고한 화장 향기 은은하겠다
차의갑 시인 / 젓가락 한 짝
층층이 깊어 가는 지하철 지하 계단 아래 빈 박스 깔고 누운 젓가락 한 짝 외관상 아직은 쓸모 있을 듯한데 그 누가 잃어버렸나 허다한 날 끼니 그릇 채우다가 닳고 닳은 구두창 텅 빈 박스 위 발목에 꿰인 채 낡은 신문지 이불 덮고 잠들었는지 잠잠하다 한때, 힘주어 걷어 올린 듬직듬직한 먹거리 곁에 알랑알랑 모여 앉던 빛나던 눈동자 근사하게 가부좌 튼 어깨 너머 푸근한 미소가 그립다 그 순간을 쉬 버렸던 욕망에 고립되어 누구 하나 건져 올리지 못하는 젓가락 한 짝 흥청망청 장단에 쭉 뻗은 모습이 팔자 같다 팔(八)자가 쪽바리 무다리 눈꼴에 깔려 힐끔힐끔 곁눈질할 때마다 볼 견자, 꼴불견이던가 이제 곧 어두운 제 그림자 거두려는 발길이 쇄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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