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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명수 시인 / 치자꽃을 만나러 가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1.
심명수 시인 / 치자꽃을 만나러 가다

심명수 시인 / 치자꽃을 만나러 가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기차를 탔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수없이 그녀를 만나야 한다

 

이른 봄 무렵의 이별

 

기차를 타고 굽이굽이 복숭아밭을 지나다

기적소리를 뿜어낼 때면

줄줄이 조롱박이 매달리곤 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굽이치는 여울을 건너야 하고

정오의 혼잣말은 풍선이 되어 떠나고

그녀에게 가기도 전에 차창에 흘러내린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네가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

하지만 그땐 몰랐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수없이 많은 그녀를 만나야 한다

수없이 교차되는 지점엔 나보다 앞서간 그녀가 있다

 

 


 

 

심명수 시인 / 밤을 줍다

 

 

한방의 총성이 있었다

아니 두 방 세 방의 총성이 있었다

총성은 난사에 가까웠고

과녁을 벗어난 총성들로 허공에 가득하다

간혹 주인을 잃은 탄피들이

빈집으로 나뒹군다

 

그러나 누구 하나

과녁을 명중시키진 못하였다

따라서 거미집은 견고했고 평화로웠다

 

한때

그러했듯 나도

총성을 남발한 적 있다

입 앙다물고 침을 가시처럼 튕기며

가시를 입 밖으로 찔러대며

아집을 쌓던,

 

여기 집 한채

공허한 문장으로 남아 있다

나는 다시 빈집을 줍는다

누가 빠져나간 집, 그리움이

뒤집혀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있다

 

-시집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에서

 

 


 

 

심명수 시인 /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잘못 꾼 꿈이 지워진 거예요. 마음이 시끄럽네요. 쮸릿, 쮸릿, 칫, 칫 물이 끓고 있나요?

 

 머릿속을 지우개로 박박 지웠더니 보글보글 구름이 생겼어요. 요리에 앞서 별표 세 개라는 걸 잊지 마세요. 너무 많이 문지르면 검게 비구름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해요. 그럼 한쪽으로 쓸어버려야 하죠. 쓸려나간 구름은 어디선가는 필요로 하거든요. 아픈 배 문지르던 엄마의 손길로 잘못 디딘 첫발을 지워봐요. 뒷걸을질 치며 구름이 송골송골 피어날 테니까요.

 

 일단은 지나가는 뜬구름 낚아채 통째로 집어넣어야만 해요. 낚아챌 때는 빠른 감각, 두꺼비 혀의 본능이 중요해요. 토끼 기린 강아지 오빠 엄마 물고기 할머니 얼굴로 수시로 변하거든요. 강아지가 싫으면 절대로 피해야 하니까요. 오빠와 엄마를 요리하고 싶으면 적절할 때 낚아서 납득시킬 만한 거리가 필요해요. 잘못하면 당신이 설득당할 테니까요. 할머니에겐 안개구름 한 소반 선물해 봐요. 그럼 그 속에 감춰진 추억을 하나하나 따내며 끄덕끄덕 하시겠죠. 그리고는 겹겹이 포개진 뭉게구름 동강동강 썰어야 해요. 구름의 남쪽, 비늘구름 잡아당겨 살점만 떠 넣고요. 다시 제 위치에 걸어놓아야 해요. 요리는 늘어놓고 하면 곤란해요. 제 살점을 잃은 구름은 몇 초 지나지 않아 다른 형상으로 변해 떠나가 버려요.

 

 하악, 그새 악어가 입 딱 벌리고 급 하강하는 줄 알았어요! 간이 철렁했죠. 긴 꼬리를 끌며 지나간 뒤에 간을 보니 싱거워요. 소금을 좀 더 넣어야겠네요.

 

 요리를 하다 보면 알게 되죠. 구름을 절대 새총으로 쏘아 잡으면 안 돼요. 조리법에 어긋나는 일이죠. 빗맞기라도 하면 냄비에 구멍이 나요. 물조루처럼 빵빵 뚫린 구멍으로 빗줄기가 쏟아질 테니까요. 조리법에 의하면 그 총탄 자국은 밤에만 보인다지요. 그것은 인간들이 쏘아댄 빗나간 꿈이에요. 별들의 실체라고도 해요.

 

 요리가 다 됐나요? 새털구름이 하늘 가득 웃자라 피었어요. 여러 빛깔로 아롱진 꽃구름이 피었어요. 배추흰나비가 노루귀 꽃잎에 앉았어요. 지나가던 바람 배추흰나비 날개깃에 머무네요.

 

 요리는 다 되었나요. 꽃구름?

 

-시집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에서

 

 


 

 

심명수 시인 / 소낙비

 

 

비의 창살에 갇혔다

저기 온몸으로 창살에 갇혀있는

수인(囚人)들이 있는가 하면

창살 영역을 지키려 처마 끝에 웅크린 자나

제 영역을 받쳐 들고 걸어가는

여자의 짧은 스커트가 자유롭다 생각하는 나는

스커트 밑으로 발을 뻗고

차박차박 어디론가 이감되어 간다

 

모두가 쓸쓸함 하나씩 매달고 있다

그녀의 창살 반경은 그리 크지 않다

나를 구속하고 놓아주지 않는 것을 봐선

종신형

그리하여 나는 몇 차례 그녀를 사살한다

그럴수록 창살은 견고해진다

 

창살 안이 넓거나 좁거나

죄 몫이 크거나 작거나

그 안에 갇혀 있던 이는 어딜 가나

그 흔적이 그대로 살아있으리

창살 안에 갇혀 있어도

오롯이 견뎌내는 저 어린 나무가

어린 물고기가

어린 새가

어린아이가 해맑다

 

 


 

 

심명수 시인 / 죽음 밖 어디쯤 있을 나

 

 

언제쯤이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거미는 결코 죽을 생각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거미가 몇 초 동안 살아 꿈틀꿈틀한다

주검의 날개가 겨드랑이로부터 돋아난다

미동도 없이 거미는 자꾸 허기를 느끼곤 한다

아까 먹다 만 치킨 날개를 후회한다

 

주검, 왠지 살아 있을 때보다 정신이 멀쩡하다는 느낌

하지만 마취가 풀리듯 점점이

암막처럼 펼쳐지는 빛

그물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던 날벌레들의 절박했던 순간,

등골이 환해진다

 

일상이 투시되던 생, 생이란

몇 층에서 누굴 만났다 몇 층으로 미끄러지는지

개인 사생활 차원에서 거미들에겐 논란의 여지가 없을 리가 없다

 

전생에서도 이승에서도 나의 빌어먹을 습성은 변함이 없다

빈손에

가방도 없어

고만고만한 인연

주렁주렁 관념들로 꼬여

또다시 복잡 미묘한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야 할,

 

우주가 소용돌이쳐 거미집에 꽃잎, 나뭇잎

날벌레들이 찾아와

위로랍시고 목숨을 선물로 바치겠지

그런 나는 타고난 식성대로 게걸스럽게 받아먹겠지

 

나는 잠시 죽어서 내가 사는 나를 본다

 

-시집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상상인

 

 


 

 

심명수 시인 / 소리의 감옥

 

 

 소리는 소리를 가둔다

 소리는 덧없이 쌓이기도 하고 난데없이 허물어지기도 한다 소리를 잡아당긴다 길게 목 하나가 떨어진다 소리가 꺾이면 소리는 바닥을 짚고 헝클어진다 헝클어진 꼬리의 꼬리는 꼬리친다 소리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10분 전은 벽을 타고 오르다 고꾸라진 도마뱀, 10분 후는 흘러내린 잉꼬, 천정을 타고 0시 대기 중인 흡혈귀,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소리의 등이 다 닳도록 긁적이는데 난데없이 오싹한,

 

 빗소리, 혈이 없고 공식이 없고 폐가 없는 패혈증 사전이 없고 사후가 있는, 시계가 없고 냉장고만 똑딱이는 그 방에는, 소리만이 혼잡한 당나귀 없는 발가락, 꼼지락거리는 당나귀 그 방에는 침대가 없고 벽이 없고 등이 자꾸 흘러내린다

 

 소리의 방은 소리로 열고 소리로 꽝 닫힌다

 소리의 뇌관에 링거를 꽂고 스탠드, 보일러, 냉장고가 혼신의 힘으로 신음을 한다 일찍이 보일러는 산통을 겪는지 졸졸졸 물이 새고 어떠한 표정도 없이 어디론가 흘려보내는 중이다

 

 가다가 엎질러지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저들끼리 소통도 하지만 불통의 구멍으로 엿들을 수밖에 없는 관음증, 창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나의 밤은 물먹은 방이다 눈 감으면 너의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접질려 뒹구는 빗소리 박박 그어 지우면, 캄캄한 소리가 하얗게 뭉개져, 더 꼿꼿한 소리의 창살로 밤이 닫힌다

 

- 2018년 <시산맥> 여름호

 

 


 

 

심명수 시인 / 최소한 신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

 

 

 물론 인간은 하나님을 신으로 모시고 산다. 인간은 각자에 걸맞은 신을 신으로 모시고 산다지, 집에도 있고 집 밖에도 있어서 마음에도 있고 마음 밖에도 있어 신발장엔 신발들이 나란하다.

 나무 위 길가 시장통, 심지어 인간이 닿는 어디라도 인간이 닿지 않은 그 어떤 곳에도 신인 신답게 신어어야 했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과 심판으로 구분 짓는다는 신, 신도 위계가 있고 색깔이 있다. 하이힐, 구두 슬리퍼 짚신 나막신, 하양 빨강 검정 얼룩 신, 지구의 신 은하를 총체적으로 주관하는 우주의 신, 그 신들도 그에 따른 체계가 있다. 그렇다고 신들도 별들처럼 반짝일 수는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을 떼어내고 살 수 없는 가치 관계.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다. 태초에 인간들은 하나님을 창조했다. 믿거나 말거나이겠지만 이 이분법을 모독하는 자들은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우주는 크고 작은, 더 크고 작은 우주가 있고 신도 크고 작은 더 크고 작은 신이 있고 있어서.

 

 보이저 1호는 42년 동안 고작 우주의 손톱 끝도 도달치 못했다.

 내 새끼발가락 사이 아픈 티눈을 탄생시킨 건 꼭 낀 신, 신발 때문이다.

 

 


 

심명수 시인

1966년 충남 금산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인천은광학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