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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권 시인 / 옛날 시인
어떤 저녁은 목젖 없는 악기,
어두운 모서리를 쥘 때마다
침묵의 운지법을 익힌다고 했지
아마도 지문은 죽지 못하는 것들의 늪,
운명이 지루하도록
연주할 수 없는 악보를 그리고,
장엄한 고요가 들어섰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눈을 감을 때마다 고이는 검은 음표들,
노래가 타들어 간 자리에는
꽃인 듯 불인 듯
타다만 저녁이 봄밤의 짐승을 부르고 있었지
-계간 《문학청춘》2022, 겨울호
황종권 시인 / 벽의 자세
방 모퉁이마다 손금이 번져 나왔습니다. 그게 우리 운명이야. 못을 박기 위해 우리는 망치를 들었습니다. 나는 오빠보다 한 뼘 더 자라기 위해 뒤꿈치를 들고, 사실은 발레리나의 흰 발목들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오빠라는 감정을 알기 위해 나는 더 오빠가 되고 손바닥을 비비면 미리 예감하는 주름이 쏟아지고 벽을 칩니다. 그게 네 벽이야. 벽을 칩니다. 그게 네 병이야. 입술을 파랗게 만드는 색소사탕을 물면 어른이 될 것 같은데 벽지에 낙서를 하면 운명을 망칠 것도 같은데 왠지 박수 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흰 발목들이 벽에서 튀어나와 못 박는 소리로 늙어 가고 있었습니다. 벽이 물고 있는 못들은 일제히 휘어가고, 오빠는 쉴 때도 옆구리를 세웠습니다. 나는 오빠를 도둑발로 넘어 다닌다고 자주 혼났습니다. 사실은 빈 액자들을 벽에 걸어 두고 싶었습니다. 미리 살아버린 벽들을 이젠 다 자세, 라고만 불러 주고 싶었습니다.
-시집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에서
황종권 시인 / 부엌은 힘이세고
부엌에서 부엌을 꺼내니까 부엌이 깨지고 엄만 깨진 부엌을 줍고 춥다가 손가락이 깨지고 깨진 손가락은 피가나지 않고 퉁퉁 붓기만 하고 퉁퉁 부운 손가락 사이로 기름 묻은 심장이 걸어나오고 심장이 마르기도 전에 나는 또 냄비를 태워 먹고 언제 그랬냐는듯 엄마는 또 밥상을 들고오고 들고 오는 모습은 가슴에 잔뜩 힘을준 보디빌더 같고
나는 목소리를 반납하고 사람이고 싶었던 여자를 떠올리고 또 술쳐먹고 또 언제 그랬냐는듯 물거품 물거품이 되고 엄만 아직도 건널수없는 수심을 몸으로만 건너려고 하고 나는 해장국 끓이는 엄마의 굽은 등을 돌돌 말아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나오지도 못하면서 그릇들이 죽었으면 좋겠고 그릇들은 여전히 단단하고 오래 물에 씻어 차라리 구릿 빛이고
황종권 시인 / 짐승으로
당신의 바닥은 끝없이 배열된 건반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악보 없이도 무덤에 가깝고 무덤 없이도 음악에 가까운 악기, 그것은 당신의 등이었다
발목이 부서지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무언가를 전개하려고 할 때 상한 보도블록에 비가 쏟아졌다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다시, 구름이 되는 비 당신은 짐승이 털을 털며 허공을 견뎠다 눈보다 등을 미리 보는 일 다치지 않는 빛을 보듯이
물먹은 가로수가 그림자를 길게 뻗는 저녁, 젖은 머리칼 냄새를 맡으며 우리는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성한 곳도 없는 표정은 가보지 않아도 미리 알아버린 지도였으므로 가장 물기 없는 형식의 체벌이라 믿기로 했다
물속의 손금이 보였다 나뭇잎이었다 물결도 능선을 가지나, 사람의 등줄기에 잔주름을 긋는 폭우 바닥은 자신이 과녁인 양 활시위를 켰고 빗소리는 견디도록 엎드려 흘렀고, 우리는 짐승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황종권 시인 / 끝없는 버릇
살구꽃 그림자가 수심을 어지럽히는 사월의 바다 살고 싶어 저녁을 부르는, 저녁이 저녁으로만 깊어가는 어두운 현기증은 입술이 지듯이 이끼 없이도 상처를 들어앉히고 최선을 다해 젖는 꽃잎은 차라리 물갈퀴이기도 했다 윤슬처럼 올망졸망한 별빛들, 지척을 가린 물속에서 더욱 그렁그렁했다 심장처럼 살구꽃잎 속에서 잠긴 이름들 사월은 어린 것들을 부르다, 핏물이 빠지지 않는 지평선을 오래 바라보게도 했다 봄으로부터 눈시울이 붉어지는 바다 잊지 말고, 기억하자고 살구꽃이 질 때마다 물멀미를 앓는, 버릇이 생겼다
황종권 시인 / 촌년의 은유
오직 촌년의 이름으로 저녁이 흘레붙는 몸이었다.
개켜놓은 속옷을 자주 잃어버렸고 곱게 접은 관절 속에서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다른 몸에 있어도
또 피부가 검어졌다. 그건 도시가 아닌가. 가장 고루한 체벌이 아닌가. 살갗에 어둠이 걷히지 않았다.
너무 자명한 것을 보면 살 섞는 일에 능란해지고 수돗물을 들이켤 때마다 묽어지는 것을 체위라고 불렀다.
신음이 창궐하는 뻘밭, 주저앉은 섬, 곱추 등에 언 발을 푸는 물새, 더럽도록 짠물, 뻘배가 지나간 자리, 질퍽한 햇빛
일평생 멸시할 은유를 그러모으고 나는 그 어디도 가지 않았다. 결국,
오직 나의 발목으로 가랑이가 차가운 빌딩 사이를 걸었다. 무릎이 뜨거웠다. 땀이 났다. 짠 내가 났다.
은유가 증발할수록 도시의 속내에 가까워지는 거라고 마음보다 몸을 묻는 일에 뜨거워지고 있었다.
-시집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천년의시작
황종권 시인 / 장미가 준 바닥
바닥이 일제히 각을 세우자, 무릎이 예리하게 빛났다
무릎이 칼끝에 가까워지면 피를 쏟고 싶어 장미를 쥐었다 장미는 꺾이도록 아름다운 계단이었나 관절이 뜨거워질 때마다 가시가 뻗어나갔다
핏발 선 노을이 허기 가득한 비문을 새길 때까지 가시는 끝없이 뻗치고 당도할 곳이 없어 각을 세우는 바닥, 목을 겨누는 칼이었다가 부들거리는 계단이었다가 혼 빠진 오르간이었다가 죄다 가시덤불이 되고 있었다
검붉게 익어가는 저녁을 걸어보았다 헛것이 낭자한 구름이 백태가 낀 달빛이 가시덤불에 뒤엉키고 있었다. 가시덤불 따위 한낱 구겨진 종이 뭉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칼끝이 반짝였지만 무릎이 꺾인 저 가시덤불이 왠지,
장미가 준 바닥이었다
-시집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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