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주철 시인 / 불행에 대한 예의
경주 계림 앞에서 아내를 안고 있었을 때 나, 세상에서 잠깐 지워졌던 것 같다
아내는 계림을 등지고 나는 들판을 등지고 서로 안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때 우리가 등지고 있었던 것은 세상이었는지 모른다
만만하게 생각한 세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아서 헉헉거릴 때 나는 아내를 사랑하면서 아내는 나를 사랑하면서 이 세상을 간신히 견뎌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와 아내가 안았던 것은 어쩌면 나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아내는 혀를 내밀며 아줌마가 되지만 오래 전 나는 내가 아니었을때가있었고 아내도 아내가 아니었을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에 남을 시련도 없는 생을 살았다 끝까지 차례를 지켜가며 누구나 만나게 되는 불행을 겪으며 살았을 뿐이다
순서를 기다리며 불행을 겪어야 하는 생,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꾸벅꾸벅 졸다가 깜짝놀라 맞닥뜨린 시시하고 아름다운 불행들, 내생이 저물어도 시들지 않겠지.
안주철 시인 / 늑대
언제 썼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편지가 늑대 한 마리가 되어 돌아왔을 때 내가 경험하고 내가 의지하면서 살아온 생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소인이 되었다
되돌아온 늑대 한 마리 때문에 나는 구멍이 숭숭 뚫린 속임수가 되었다
내가 기른 망각 때문에 내가 편지를 잃어버렸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기 때문에 되돌아온 편지를 당홀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주인이 되고 말았다
늑대가 돌아와 젖은 털을 털며 험악한 계곡을 토해낼 때에도 나는 늑대가 경험했을 것 같은 고요한 숲을 단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았다
나는 나를 원망할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 낭비해야 할 것들을 구분하지 못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썼는지 잊어버렸지만 내게 돌아온 늑대는 분명 편지였다는 사실을 끝까지 거부하면서 나는 늑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꿈에서 본 새를 떠올리고 하늘을 떠올리는 실수를 마음껏 반복해서 저지르면서 늑대에게 주어야 할 먹이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다
이제 나에게 남은 생각으로는 저 늑대의 눈빛을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불러오는 만족에 마지막까지 의지하면서 늑대가 되어 돌아온 편지를 읽지 않기 위해 내 앞에 있는 늑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슬픔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아무도 읽지 않는 편지가 되었다
안주철 시인 / 모르고 지나칠 수 있어요
사랑에 대해 생각합니다 먼 듯도 하고 가까운 듯도 하지만 빗나가는 다른 곳 다른 시간 내가 감지할 수 없는 희미하고 불안한 시간 밖에서 확실해지는 저 잘은 모르는데 차곡차곡 행복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말보다 먼 곳에서 홀로 아름다워지는 사랑 난 잘 몰라 홀로 먼 곳에서 걷고 있는 나 몰래 당신도 모르게 어디에 있는지 평생 짐작해야 하는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느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손에 쥘 수 없는 감사합니다 겸손으로도 다가갈 수 없는 그래도 감사합니다 사랑 근처를 지금 지나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안주철 시인 / 치킨
치킨은 아무리 자주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치킨은 먹으면 먹을수록 선명해지는 신의 마지막 선물임에 틀림이 없다 이럴 수는 없다 이건 음식이 아니다. 확인할 길이 없다 아 치킨!
물리게 먹어도 치킨은 며칠 지나지 않아 먹고 싶은 마음이 금세 한 마리가 된다. 치킨은 순환한다 치킨은 자전한다. 치킨은 공전한다. 아 치킨, 오 치킨, 오우 치킨!
치킨이 먹고싶다 아이 몰래 아내와 하고 나서도치킨이 먹고싶다. 이 시를 읽고 있는 당신도 치킨이 먹고싶겠지?
치킨을 주문하라 치킨의 참맛을 알기 위해 치킨의 위대함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싸움을 하든가 이혼을 하든가 직장상사의 싸대기를 노을 끝까지 올려붙이든다
다 읽었으면 치킨을 주문하라 두 마리도 좋다. 네 마리도 좋다.
안주철 시인 / 몰래 대답하고 혼자 웃어요 비가 내리고 있어요 언젠가 한 번 서로 알아본 것 같기도 해요 맑은 눈과 지친 눈이 만나서 함께 캄캄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비가 내리고 있어요 어깨였을까 이마였을까 손등이었을까 털어내지 않았던 밤도 있었어요 빗방울들이 지붕에 플라스틱 차양에 내리면서 손바닥을 펼치고 있어요 손바닥을 펼치자마자 수많은 손끝들이 흩어지면서 사라지는 소리는 듣지 못해서 아쉬워요 마음을 조금 꺼내서 비가 내리는 창밖으로 내밀었어요 손바닥과 손가락이 흩어질 때까지 빗방울들의 손바닥과 손끝이 어디까지인지 모르지만 캄캄해서 부끄럽지 않은 밤이에요 비가 내리고 있어요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있어요 이런 밤에는 마음이 다 풀어져서 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없어도 될 것 같기도 해요 너 뭐해? 나를 부르는 소리는 아니지만 몰래 대답하고 혼자 웃어요 —월간 《현대시》 2023년 7월호
안주철 시인 / 함부르크
시롭게 죽을 고향과 새로운 무덤이 생겼다. 어둠을 오랫동안 만질 수 있는 머나먼 북구의 향구가 생겼다.
내가 태어난 고향이 나보다 먼저 죽어서 고향도 아버지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지만 미련한 비유에 기대어 살기에도 지쳐서 잘게 떠는 손끝에 걸리는 술잔이 무거워서
해변으로 바다의 나이를 세는 파도가 밀려온다. 엄마의 봉대를 푼다. 피에 젖은 거즈가 밀려온다. 등을 돌리고 밀려온다.
내가 낳은 딸아이의 고향은 수평선 위에 꽃이 피는 먼 나라이기 때문에 내가 내터난 마음과 쑥스러운 국적을 잊기로 한다. 죽은 나무에 물을 주듯이 죽은 나무에 내 손의 떨림을 기울여주듯이 잊기로 한다.
방파제에 앉아 삶은 문어를 들고 삶은 방파제를 떠올리다 낚시바늘에 걸린 잡어처럼 피식 웃는다. 딸아이에 발가락에 모래가 낀 것 같지만 파도가 센 것이 꼭 모래의 나이만은 아닐 것이다.
안주철 시인 / 너는 나인 것 같다
우리는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없는 것처럼
우리는 아직 덜 사라졌다 섭섭하지만
내가 가진 것은 너 또한 네가 가진 것은 나 또한 확인할 수 없지만 가지고 있다
나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을 벗어나는 나의 이상한 행동이 너의 이상한 행동을 닮아 있다
너는 운다 나는 우는 너를 본다 나는 운다 너는 우는 나를 본다
우리가 끝까지 감추지 못하고 서로에게 민망한 장면을 하나씩 상영할 때
우리가 서로 미워하면서도 웃고 우리가 서로 만나기 싫으면서도 마주앉아 늘어진 시간을 톡톡 부러뜨릴 때
너는 운다 네가 모르는 곳에서 나는 운다 내가 모르는 곳을 만들면서
나는 너인 것 같다 미안하지만
너는 나인 것 같다 불쾌하겠지만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혜수 시인 / 바람이여, 꿈이여 외 7편 (0) | 2026.01.11 |
|---|---|
| 유계영 시인 / 호랑의 눈 외 6편 (0) | 2026.01.11 |
| 황종권 시인 / 옛날 시인 외 6편 (0) | 2026.01.11 |
| 심명수 시인 / 치자꽃을 만나러 가다 외 6편 (0) | 2026.01.11 |
| 한길수 시인(화천) / 가방의 어원 외 5편 (0) | 2026.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