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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계영 시인 / 호랑의 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1.
유계영 시인 / 호랑의 눈

유계영 시인 / 호랑의 눈

 

 

나를 벌레라고 부르자

사람들이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왔다

 

오늘은 긴 여행을 꿈으로 꾼 뒤의 짐 가방

검은 허리를 무너뜨리며 떠다니는 새벽

그림자를 아껴 쓰려고 앙상하게 사는 나무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은 미끄러운 경험

 

바람에게 그림자가 없다고 믿는다면

떨어지는 잎사귀에도 속력이 없다

 

증상 없는 병을 병이라 부르지 않으니

나는 이름도 없는 나날

 

-시집 < 온갖 것들의 낮 > 민음사, 2015년.

 

 


 

 

유계영 시인 / 꿈

 맞은편 상가건물의 옥상에 작은 웅덩이는 일 년 내내 마르지 않았지. 손차양도 펼치지 않고 선글라스도 쓰지 않고 사계절 내내 빛났지.

 

 담배를 피우려고 하루에 열 번쯤 창가에 서서 그걸 내려다봤단다.

 바다는 충분히 구겨진 채로 명성을 유지하고 찌개는 새카맣게 탔지만, 저 물웅덩이만큼은 절대로 줄어들지 않더군.

 

 돌처럼

 채석장과 포석공이 있는 도시 계획처럼

 작은 웅덩이 옆에 큰 웅덩이 상상할 수도 있었지만

 

 옥상은 비어있었어. 꽃과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양동이를 흔들거리며 오르는 사람은 보지 못했어. 목을 축이거나 몸을 적시러 찾아오는 새들도 보지 못했지.

 

 이거 하나 알겠더군.

 비가 갠 날엔 물웅덩이가 자연스러워 보이더니 몇 달 거푸 가무는 뙤약볕에도 물웅덩이는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걸

 (웅덩이란 어느 정도 초현실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지)

 어디서나 저 물웅덩이를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숲을 산책할 때면 내가 나뭇잎 한 장인 것처럼 걸었어. 창가에서 물웅덩이를 내려다보고 있을 땐 누드 모델처럼 서게 됐지.

 밤에는 검게 낮에는 투명하게 푸른 페인트 자국의 요철을 다 보여주면서

 

 웅덩이만큼만 물웅덩이가

 저기가 조금 더 움푹한가 봐, 생각하게 하더군.

 저 옥상보다 높은

 내가 사는 집 옥상 생각하게 하더군.

 

 바깥을 밀며 차오르는 물

 인간의 너무 인간적인 생각처럼

 오래 널어놓은 티셔츠 한 장이

 경직된 어깨를 쭈뼛거리며 빨랫줄을 벗어나는데

 

 처음 추는 춤

 옥상이 부르는 것 같았어.

 

 


 

 

유계영 시인 / 반드시 한쪽만 유실되는 장갑에 대하여

 

 

접힌 색종이로 테디베어를 오려요

내가 줄줄 태어납니다

테디베어가 테디베어를 끌고 나오는 것입니다

여자에게 여자아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처럼요

손뼉 치던 사람이 짧은 순간

손바닥 사이로 하프를 펼쳐놓습니다

거대한 물방울을 연주합니다

암전 중의 대공연장

빛의 반대는 어둠이 아니라 빛의 없음입니다

포승줄에 묶여 줄줄 끌련난온는 빛의 암살자들은 압니다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살 수 없음입니다

침실의 귀여운 친구 테디베어

수만 명의 아이들을 잠재우고 있습니다

눈동자가 의식과 멀어질 때

악수가 제자리로 돌아갈 때

푸른 덩굴이 웅성웅성 점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반쪽이 사라진 상태로 오랫동안 자장가를 꿰매고 있습니다

너 자신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훌쩍 자라게 되는 거란다 속삭이면서

아이가 쥐기 반사에 열광하던 시절

뜯어간 왼쪽 눈알

아이는 아직도 꼭 쥐고 잡니다

 

 


 

 

유계영 시인 / 잘 도착

 

 

보여주겠다

내가 어떻게 길을 잃는지

 

멈추고 싶은데 전진하는 것

나아가고 싶은데 정지하는 것

해저의 지느러미처럼

발목의 결심이 물거품 되는 것

바닥인 줄 알았는데 깊이

더 깊이 가라앉는 것

 

길을 놓친 발목들을 다 주워 먹고

사거리는 배가 부르다

 

앞서 택시를 탄 사람들이

어디든 당도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단지

다물어지지 않는 도형처럼

도착지로 향한 사람들은

영영 출발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죽으면서 동시에 성장*하는 종족은 그렇다

 

창밖을 빠르게 지나가는 슬라이드쇼-

눈을 떼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본 것이 없는데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내린다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모차에 누운 아기는

떠미는 손을 기다리며 웃고

부축의 손이 겨드랑이를 들어 올릴 때까지 운다)

 

태양의 엄지가 정수리를 꾹 눌러 나를 고정시킨다

나는 허공을 잡아당기며 겨우 한 걸음 걸었다

 

 


 

 

유계영 시인 / 은둔형 오후

 

 

맑은 날 비가 내리면 창밖을 봐주기를 염원하는 누군가의 기도가 통했다는 것

거울은 긴 팔로 방의 꼭짓점들을 끌어안고 있다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핸드폰을 만지며

울고 웃는 한 사람을 지켜주려고

 

거울의 관심은 오직 자신뿐이지 그러나

은둔자의 관심사는 오직 외부에 있기 때문에

둘은 오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자나 깨나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을 문득 극복해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맑은데도 비가 내리기 때문에

은둔자는 거울을 떼어다 골목에 내놓았다

 

가져가면 필요하시오 누구든 필요하시오

환영은 아무나 합니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

네개의 꼭짓점을 158개씩 겨누고 있는 서적들을 바라본다

그 위로 작고 부드러운 먼지들이 가라앉는다

거울의 민감한 팔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둥둥 떠다니던

사각형의 책상과 침대

의외로 육각형인 강아지 얼굴

인중이 뭉개질 때까지 콧물을 훔치게 했던 피크닉의 기억이

바닥에 잘 붙어 있는 것을 바라본다

 

허술한 태양이 자신의 꼭짓점을 놓칠 때

맑은 날 비가 내렸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는 누군가 기도 중이라는 의미일까

저주가 기도의 내용으로 부적격하지 않다면

 

우산의 어설픔 때문에 온 얼굴이 침 범벅인 행인들 사이에서

거울은 빗방울을 속기하고 있다

자신을 다시 주워오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올

한 사람을 지켜주고 싶어서

 

 


 

 

유계영 시인 / 접골원

 

 

바닥의 셀 수 없는 구멍

맨홀의 셀 수 있는 구멍

 

쥐는 자기 대가리만 들어갈 수 있는 어떤 빈틈에라도 들어간다는데*

물처럼 물처럼

 

나쁜 습관도 늙어갈까

탕진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탕진하고

 

우리에겐 더 큰 구멍이 필요하다

보기에 좋은 어깨 때문이다 구멍에서

어깨가 끌려 나옴과 동시에

삶이 시작되었듯

 

육체를 반으로 접어 삐뚤어진 그림자를 들키는 대신에

하루를 반으로 접어 절반의 시간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은행나무의 등걸잠

죽은 잎사귀를 한꺼번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주의깊게 하나씩 양을 늘려가며 포기해야 한다

 

공사중을 알리는 야광봉이

가짜 인간의 팔 끝에 매달려 밤새도록 흔들린다

 

물이 물처럼 얼음이 되고 얼음이 얼음처럼

빙벽이 되는

자세의 거대서사

 

나는 골절의 경험이 없고 아직 죽음에 어긋난 적 없으니

곧 다시 오겠다 미래 시간에

 

*김중식, 「참회록」에서

 

 


 

 

유계영 시인 / 좋거나 싫은 것으로 가득한 생활

 

 

눈동자 한 숟갈만 퍼먹어도 되겠니 매우 달콤할 테니까

고약한 네가 아름다운 시를 써와서 영혼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흔적토끼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은거지로 삼는다지만

깡총걸음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영혼의 일이라지만

 

아침엔 멀리서 네가 새치기하는 것을 목격했다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그것이 떠올라 미소 짓게 됐고 기분 좋게 됐고

영혼이 하는 일을 조금 이해하게 됐다

몸의 문이 살짝 열렸다 닫히는 것도

 

허겁지겁 먹다 말고 접시 위의 폭찹을 골똘히 바라본다

애지중지하는 작은 개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너 동물이니?

우리는 마찬가지니?

 

왜 이렇게 싫어하는 것이 많으냐는 지적을 들었다

우리의 악몽이 더 이상 정교하지 않다는 사실은 견딜 수 없지

깊은 함정에 빠져 있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한 숟갈만 퍼먹어도 되나요 매우 달콤할 텐데요

묻고 싶었으나

 

꿈에서도 너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여서 보이는 만큼만 슬픈 사람들

에 대한 이야기를 줄 세운다

 

나는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든다

 

영혼이 하는 일을 알게 된 이후

 

 


 

유계영 시인

1985년 인천에서 출생.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