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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복희 시인 / 아프다는 건 말이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1.
도복희 시인 / 아프다는 건 말이지

도복희 시인 / 아프다는 건 말이지

 

 

당신을 맘 놓고 그리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눈빛 맑아진 틈을 타서 어쩌면 정면을 바라볼 수도 있는

 

소심한 곁눈질 거두고

평소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짓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릴 수도

있겠다는 결심

 

늘어난 태잎처럼 느려진 동작들

그 안으로 불쑥 들이미는 연모라는 색채는

무시무시한 원색의 나열

 

도심 한복판, 병실은 섬처럼 동동 떠 있고

표류하는 난민의 가슴으로 창의 바깥을 바라보는 일

 

캄캄한 풍랑 앞에서

호흡 가다듬는 자세가 되는 거

 

눈꺼풀 닫고

바다의 소리로만 물길을 여는 잔뼈 굵은

어부의 아내가 되는 상상

 

아프다는 핑계로, 죄가 될지 모르는 당신을 탐닉하는 거

 

어망 가득 끌어 올리는

펄떡거리는 저 그리움의 정면이 되는 거

 

돛대를 높이 올린 배가

헤일 속으로 들어가는 거

 

아프다는 핑계로 감정의 극단까지 기어오르던

대학병원 입원실 1009는 출렁거리고

 

 


 

 

도복희 시인 / 눈사람

 

 

서로를 껴안자 녹아버렸어

남은 건 나였지만 남아서 지옥문을 열었지

모든 계절이 겨울이었으나 돌아온 건 네가 아니야

몸의 온기를 없애려고

하루에 네 번 심장을 멈추었어

포옹으로 하나였을 때

그때만 살기로 했으니까

빙하기를 걷는 날 모든 창밖은 의혹이지

처음 이전으로 돌아간 목소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눈과 눈이 다른 곳을 굴러다니고

기다리던 발자국은 폭설에 파묻히고

사방은 아무도 밟지 않은 처녀지처럼 눈뜨지

 

-시집 『바퀴는 달의 외곽으로 굴렀다』에서

 

 


 

 

도복희 시인 / 외로움과 함께 동거하는 법

 

 

그를 억지로 밀어내지 마라

싱크대에 부착된 라디오의 기능을 살려

FM98.5 음악방송을 틀어줘라

하루 종일 집안에 혈액 같은 클래식이 돌게 하라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불러 들이지 마라

안개 자욱한 그리움과 놀게 하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나

한발 들어서면 선명해지는 석호리 마을을 탐색하듯

생을 알아가라

호흡에 집중하라

초침소리에 과민 반응 보일 것 없으니

오래된 연인들처럼 외로움과 마주하라

간간 눈빛도 맞추면서

손가락과 손가락을 가로질러 맞잡아라

꼭대기 층의 일몰을 끌어안고

조용히 찻물을 끓여라

찻잔의 온기에 기대 오래 앉아 있으라

그 외로움이 스텝을 이끌게 하라

 

 


 

 

도복희 시인 / 사소한 날의 억양

 

 

너를 볼 수 있어서 억양이 생겼다

 

사소한 하루에 무지개가 떴다

비 온 뒤 해 뜬 어느 날

옥상에 올라간 이유는 일곱 가지다

알 길 없는 길에서 만난 무지개가 그날의 억양이다

 

어제는 주름질 때까지 머무르게 될 것이다

 

무지개를 전송받고

네가 거짓말처럼 왔다

 

고독해 보였으나 여전히 눈부셨다

나는 이미 눈멀었으므로

바깥의 어떤 풍경도 들어오지 않았다

너의 윤곽을 잡고 버틴 하루가

잠깐의 무지개 같았다

하루가 기울고 저녁 빛 내려앉을 때

수면을 차고 오르는 물고기처럼

널 향한 내 목소리에도 힘이 생겼다

 

이것이 오늘의 억양이 되었다

 

―<시인정신> 2019년 가을호

 

 


 

 

도복희 시인 / 엄마는 12월의 화투를 좋아했다

나이 든 딸과

더 나이 든 엄마가

슬래브 집에서 화투를 친다

문밖으로 눈이 펄펄 쌓이고

점당 10원짜리 내기 화투로

시간을 다듬는다

이른 아침밥은 이제 필요 없다

아무도 녹슨 대문을 나서

골목을 빠져나가지 않는다

조용히 늙어 가는 마을

청단 홍단에 반짝, 화투패 들어맞는

소리만 출렁인다

고관절 실금으로 주저앉은

겨울이 지나가고

1월에서 12월 사이

비광 달광이 동무처럼 왔다가

흩어지는 동안

감나무 밑동만 남은 마당

저녁은 혼자서 똬리를 풀어내고 있다

잠금쇠 단단히 걸어 둔 한 평 방에는

찐 호박구마 놓여있고

벚꽃, 난초, 홍싸리 무더기로 들어온다

숨 막히는 꽃들의 싸움으로

모처럼 환한 겨울밤이다

-시집 <몽골에 갈 거린 계획> 시인의 일요일, 2023

 

 


 

 

도복희 시인 / 이별 메뉴

 

 

쇼팽 환상곡으로 부탁해요

선율에 기대어 탈출을 시도해 보려고요

노르웨이 자작나무 숲의 통나무집

새벽이 무지갯빛으로 물드는 곳에서

누구도 마주치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요

움푹 파인 초승달에 걸터앉아

낮달이 될 때까지

밤의 벼랑을

뜬눈으로 보내야 할 테지만

상관없어요

당신이라는 감옥에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발자국 사라진 사막을 걷는 일이 대수겠어요

한때 인연이라 믿었던 사람이

숨통을 조이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기대는 죄가 되죠

모든 당신은 환영이었습니다

맨발의 도망자 되어 자작나무 숲길을 달려가요

쇼팽곡으로 부탁해요

 

 


 

 

도복희 시인 / 언제부터 서로에게 모든 기대를 내려놓게 되었나

 

 

기대가 사라진다는 건

봄이 되어도 꽃이 피지 않는다는 거

한겨울의 폭설이 녹지 않는다는 거

더 이상 하고 싶은 대화가 일어나지 않아

서로에 대한 관심에서 아웃된다는 거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 무엇도 읽어 내지 못하는 거

기대가 없다는 건

그가 사는 현관문을 지나쳐

사막으로 가는 계단을 밤새 오르는 거

발이 붓고 외로움이 붓고

새벽에 당도하지 못하는 계단을

수도 없이 세야 하는

마른 입술이 되는 거

무미의 맛처럼 더는 아무런 맛도 느낄 수가 없는 거

그건 말이지

별이 뜨지 않는 캄캄한 길에 혼자 서 있는 거

 

-시집 『몽골에 갈 거란 계획』에서

 

 


 

도복희 시인

1966년 충남 부여 출생.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한남대학교 사회문화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계간 《시와정신》 신인상. 2011년 <문학사상> 으로 등단. 2018년 시집 <그녀의 사막> <바퀴는 달의 외곽으로 굴렀다> <외로움과 동거하는 법> <아이스크림 튀김>. 2010년 천강문학상 수상. 2011년 문학사상 신인상. 동양바이오뉴스 취재부장. 옥천향수신문사 기자. 동양일보 취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