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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호 시인 / 바람 속에서
나이 쉰 다섯을 넘어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곧잘 하게 됨은 슬픈 일이다. 곧게 자랐으리라는 단순한 판단이 굽어진 그림자 곁에서 가슴을 치고, 새들이 날아와 앉지 않는 마른 골격의 나뭇가지엔 남긴 열매도 없이 단풍이 든 몇 잎의 집착들이 시든 햇빛을 모우고 있다.
길은 저물수록 좁아지며 마을 혹은 산길로 뻗는다. 아니 아주 드물게는 막막한 바다에 닿는다. 흰 저녁연기들 정겹게 살 부비며 오르다가 발자국도 없이 사라지던 풍경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산으로 오를수록 가까운 길은 힘겨운 어둠으로 깊어가고 먼 길은 제 홀로 별빛으로만 빛난다.
낮은 데 머리를 두고 강물에 누웠더라면 수평의 무한 속에 스스로를 숨겼을 이법, 길은 다음 길의 품에 머리를 묻으며 걸음을 바로 하지만, 등 뒤로 쌓이는 낙엽들의 무거운 신음소리 ― 그래, 바람이 분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바람의 무게에 온전히 나를 실을 수만 있다면, 새들을 감싸 안는 투명한 손을 얻겠지. 내게 비롯된 내력의 꼭 그 만큼의 진실로.
-{시와시학} (2004. 여름)
손종호 시인 / 모일某日
그리웁다 한숨 지으면 어디선가 꽃잎 하나 질 듯한 그런 날
뉘우침마저 사치로워 그저 먼 하늘가 흰 구름으로 머물고 싶은 그런 날
드뷔시의 음악 속에 눈썹을 떨며 내 안에 무너져 오는 그대 빈 그림자
그리웁다 중얼그리면 내 몸이 하이얗게 재로 무너질 듯한 그런 날
손종호 시인 / 우리들의 연혁(沿革)
밤 유리창에 한 마리 나방이가 퍼득입니다. 등 뒤 어둠 속에는 그가 헤매어 온 길들이 흐느끼고 바람은 그 길을 따라 나뭇잎 흔들며 제 영혼의 힘을 비춰봅니다. 오오 흘러가는 것들은 아름답지만 흐를 수 없는 분열의 어리석음이 불빛을 부릅니다. 미지를 향한 머리맡엔 투명한 절망이 이리 단단하고 온 밤의 이마를 적시는 그리움의 피. 막막한 심연 위로 떠오르는 아득히 오래된 눈물이 하나 중천에 별이 되어 굽어봅니다.
손종호 시인 / 이어도
한라에 서면 산바람 바다에 서면 바닷바람 섬은 왜 섬을 부르는가
바람이 바람을 몰고 오듯 그리움은 더 큰 그리움을 몰고 오는가.
집어등 켠 밤배들 고요히 몸서리치는 물결 사이로 서면 홀연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꽃 같은 섬 하나.
오오 발길 닿으면 종내 돌아올 수 없는 아득함으로 끝간 새벽에 내 그대를 맞으리라.
이어도여 이어도여 지친 영혼의 그림자로 쌓아 올린 영원함이여.
손종호 시인 / 구도(構圖)·2
비행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면 보인다. 서 있는 것들은 점(點)이 되어 흐르고 엎드린 것들은 선(線)이 되어 뛰는 즈음 시대의 아픔이
그런데 또 먹장구름 속을 뚫고 오르면 비내리는 지상과는 전혀 다른 하늘이 있다. 신의(神意), 영원 혹은 뜨거운 뉘무침 뒤의 눈빛 같은 무한(無限) 푸르름
손저으며 우리들의 항로(航路)는 시계불량(視界不良) 허공을 가르며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 속으로 가는 흐릿한 구름 속
-<문학사상>1988년 3월호, 시와 산문 -
손종호 시인 / 치유
치유란 하나로 돌아가는 일이다
하루의 상처를 싸매며 새들은 숲으로 가고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하구에 머뭇거리던 강물도 고개를 숙이며 바다로 깃든다
저무는 마을을 하나같이 싸안고 도는 예배당의 종소리 걸음을 멈춘 구름도 산마루 가까이 기대어 선다
나누어진 것들을 꾸짓는 듯 죽음이 얼마나 넉넉한 품인가를 침묵으로 보여주듯 어둠은 별빛조차 덮어버렸다
이제 남은 일은 오직 하나 길 찾는 누군가를 위해 빈 창가에 등불 하나 밝혀야한다
손종호 시인 / 별들의 처마에
마음에 강이 없고서야 어찌 바다 있으랴 날개에 눈이 없고서야 어찌 구름 위를 꿈꾸리. 그대의 지느러미가 파도의 슬하에 부유의 목을 묶고 그대의 눈물이 능선 너머 별들의 처마에 닿는 때 세상 어둠은 비로소 그대 안의 허공에서 무너지리.
-시집 <새들의 현관>(시와에세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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