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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음 시인(문희정) / 앉아 있는 사람
그가 앉아 있다
3인용 가죽 소파 한 귀퉁이에 닳고 얼룩진 매트리스 위에 바람 부는 세 발만 남은 식탁 의자에 더럽혀진 2월의 눈밭 위에 쇠로 된 시소의 안장 한 끝에 어느 빌라 에어컨 실외기 위에 골목 어귀 콘크리트 계단 가운데 멋대로 웃자란 강아지풀을 뭉개고 엉망이 된 잔디의 검푸른 물 위에 나란한 두 개의 무덤 사이에 허기진 짐승의 늑골 곁에 말들이 끝나버린 입술 아래에 불가능한 사랑의 복숭아뼈 위에 그리고 다시 소파로 그는 돌아와 앉아 있다 슬픔이라곤 처음인 손님의 얼굴로
얼굴이 소파 속으로 꺼져 있다 얼굴을 머금고 소파가 앉아 있다
희음 시인(문희정) / 목뼈들
네 농담이 어제와 같지 않았다 꿈이나 꿔야지, 나는 입을 오므리고 모로 누운 너의 등에다 씹다 만 껌을 붙여 두었다
허우적거리는 너를 보았는데 너는 너무 멀었고 나는 웃고 있었다 웃음은 계속되었다
긴 잠에서 깨어 다시 그 껌을 씹다 보면 나는,아주,오래,걸어왔구나,
창 너머로 낡은 다리를 보는 걸 우리는 좋아했는데 그곳을 찾는 건 떨어지려는 사람뿐이었다
여름이었고 마당에 작은 목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햇볕이 목뼈들을 조이고 있었다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농담이 흘러넘치고 비가 내릴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그들은 고요를 이어 갔다
한쪽에서 누군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도 여름이었다 하품을 하고 아까시를 꺾고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 느리고 더운 바람에도 잎사귀는 모조리 날아가 버려서 꿈이나 꿔야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아무도 없고 너의 등짝 위엔 잇자국들만 선명하다
잠긴 채로 고장 나 버린 하드케이스 그것을 대부분 버려두고 이따금 썼다 테이블입니다 의자입니다 발길질을 부르는 돌부리입니다 한숨을 쉬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구멍 어머니는 그것으로 틀어막았다 먼 곳을 바라보면 아름다웠다 모르는 것들이 반짝이고 고요한 것은 변함없이 고요했으므로 어머니는 밤새 노래를 불렀다 빠짐없이 칠해진 노란 바탕처럼 우리는 노래를 따라 불렀고 모든 노래는 돌림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너덜너덜해진 귀가 묵음을 얻을 때까지 두드리는 소리 들리면 돌아보지 않고 큼직한 보폭으로 무섭게 걷고 붉어진 발끝으로 우리는 차고 발톱 빠진 살덩이가 빳빳하게 설 때까지 어머니의 고음은 들리지 않았다 돌부리입니까 뭉쳐진 밥입니다 오래 고인 물이기도 합니다 뭉툭해진 모서리로 앞다투어 뭉개고 비질비질 우리는 웃는 겁니다 그러면 또 어디선가 두드리는 소리가 끼어드는 겁니다
희음 시인(문희정) / 어루만지는 높이
계단을 오른다 멀어지는 머리를 세고 차가운 난간을 쓰다듬고 심장처럼 자신의 무게를 가늠하는 너무 익은 감처럼
계단을 오르며 내려다보면 내일이 오늘을 밀어내는 것이 하나가 하나를 어루만지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루만지는 시간은 맥박과 맥박 사이에도 있어
숨죽이지 않고도 나는 이토록 고요해져서 바람이 내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조금씩만 밀어내기로 한다 무른 과일을 씻으며 발끝에 힘을 준다
소리를 불러낸다는 건 바람이 지은 계단을 당겨 오는 것 그것은 한없이 말랑하고 깊어 계단에 맞춰 흥얼거리며 나는 없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고
희음 시인(문희정) / 보물찾기
집에 가자 같이, 가자
등을 돌리고 오빠는 바위 틈새들만 유심히 살폈다.
나는 매일 숲으로 만나러 갔다. 이를 빛내며 오빠는 웃었다. 점점 더 자주 웃고 웃어 보일 흰 이가 모자라다는 듯이 오빠는 말라 갔다. 보여, 뼈들이 빛에 겨워 반짝이는 거?
구덩이가 늘었다. 그 안엔 희고 앙상한 쪽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펼치다 말았는지 접다 말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숲모서리 그것들은 모조리 칼날 같구나
거듭 오빠의 얼굴 앞에 섰다.
입술은 얼어서 떨어지지 않는데 누가 어느 구멍으로 바람을 불어넣는지 나는 자꾸만 몸이 부풀었다.
갇힌 말은 입속에서 영원히 사는지 살기도 전에 죽어 버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바짓단과 소맷단을 접어 올렸다. 피가 돌지 않을 때까지
이 숲에게 줄 것이 너무 없구나
길게 눈을 감았다 뜨면 튼 살이 늘었다.
나는 가족을 두지 않았다.
희음 시인(문희정) / 나갈 때는 불을 켜놓는 게 예의인 집에서 삽니다
바깥에 대해 말해줘요, 까만 눈으로 반짝이고 또 반짝이며 조르던 시절도 있었죠 그 시절은 이제 모래 같은 미래 혹은 묘비 어젯밤엔 모기 한 마리를 놓치는 바람에 밤새 꿈에 붙들렸는데 거기가 얼마나 안전한 곳이었냐면 아무도 없다 못해 나조차 없어서 물어뜯기는 일 같은 건 애초에 벌어지지 않는 곳 내 목소리만 우렁차던 곳 목이 말라, 자꾸 타들어가, 당신 몸의 수분과 선의가 필요해 어디 누구 없나요, 없나요, 일어나 싹 잊고 바깥일을 나갑니다 튼튼한 팔과 다리 맑은 정신을 자랑하면서 거짓말하고 거짓말하고 웃고 기도하고 거짓말하고 아침의 거리에는 분홍 토사물들 생명 없는 것들이 왜 자꾸 말을 거는 건가요 나는 잊을 게 많은 사람처럼 양의 이마를 셉니다 너무 아픈 사람들의 안부는 간혹 신문에서, 국민청원에서 대신 물어줘서 나는 따라서 앓고 숨 쉬고 물을 마시다가 미래 없는 미래로 가는 마음을 붙들기 위해 뭐든 하는 겁니다 변색되었으나 여전히 순한 것들의 이마 거짓말처럼 풀을 뜯으며 생활과 기쁨 속에 섞여 있는 것들 어떻게든 하면서 지내야죠 찾을 걸 찾아야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도 사는건 사는 겁니다 모두에게 처음인 내일 아침 바깥에 대한 헛된 꿈을 루틴처럼 키우며 이따금 다른 질문들 사이에 숨겨서 묻곤 합니다 바깥에 오래 있다 보면 돌아가고 싶어지나요,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그렇다고 대답하면 우리가 친구이던 시간을 조용히 애도합니다 우린 너무 달라, 이런 말은 슬프니까 허기를 참는 힘이 늘어갈수록 나는 비대해지고 친구들은 작아져 보이지 않는 기분 어제는 내 발 하나 씻는 것도 길고 가난한 여행처럼 느껴지더군요 내일이면 나의 몸은 더 커질 거라서 친구 한둘쯤은 또 사각지대로 흩어지겠지만 난 조금 두리번거리다 말겠죠 그게 내 일이라는 듯이 거짓말하고 거짓말하고 웃고 기도하고 돌아가 꾸역꾸역 발을 씻고 자고 -계간 『시와경계』 (2023년 봄호)
희음 시인(문희정) / 온쉼표
잠긴 채로 고장나버린 하드케이스 그것을 대부분 버려두고 이따금 썼다 테이블입니다 의자입니다 발길질을 부르는 돌부리입니다 한숨을 쉬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구멍 어머니는 그것으로 틀어막았다 먼 곳을 바라보면 아름다웠다 모르는 것들이 반짝이고 고요한 것은 변함없이 고요했으므로 어머니는 밤새 노래를 불렀다 빠짐없이 칠해진 노란 바탕처럼 우리는 노래를 따라 불렀고 모든 노래는 돌림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너덜너덜해진 귀가 묵음을 얻을 때까지 두드리는 소리 들리면 돌아보지 않고 큼직한 보폭으로 무섭게 걷고 붉어진 발끝으로 우리는 차고 발톱 빠진 살덩이가 빳빳하게 설 때까지 어머니의 고음은 들리지 않았다 돌부리입니까 뭉쳐진 밥입니다 오래 고인 물이기도 합니다 뭉툭해진 모서리로 앞 다투어 뭉개고 비질비질 우리는 웃는 겁니다 그러면 또 어디선가 두드리는 소리가 끼어드는 겁니다
희음 시인(문희정) /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은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밭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곱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류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곱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고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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