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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곤택 시인 / 다짐하는 아침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2.
임곤택 시인 / 다짐하는 아침

임곤택 시인 / 다짐하는 아침

 

 

싸게 파는 갈치 싸게 파는 양파 싸게 파는

트럭 한 대가 창을 가리고 선다

 

무심해야지 바람처럼 궤짝처럼 문턱처럼 새떼처럼

잠들어야지 맹수처럼 병자처럼 잠든 적 없는 것처럼

살이 빠진다 신경질이 는다

흘러가도 흘러가도 흘러가지 않는

아침 뽕짝

 

-시집 <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에서

 

 


 

 

임곤택 시인 / 그러지 말걸

 

 

소리 지르는 아이를 참다가 참다가

그 엄마에게 항의했다.

그러지 말걸 그랬다.

 

눈이 내렸고 눈을 뭉쳤고 벽을 맞혔다.

 

말을 그치자 말이 없다 잠깐 뜨겁고 오래 차갑다.

생면부지의 열애는 늘 이렇다.

 

주머니에 손 넣어 동전을 짤그락거린다.

눈이 계속 내린다.

 

벽에는 내가 던진 눈 뭉치가 뭉개져 있다.

그러지 말걸 그랬다.

 

 


 

 

임곤택 시인 / 겨울에 좋은 일

 

 

물이 끓는다

끓는 물에는 짐승들 울음같이

거슬리는 자극이 있다

 

끓는 물에는 라면을 넣으면 좋다

시금치를 데칠 수 있다

찬물과 섞어 얼굴 씻어도 좋다

하수관이 터졌다면 더 좋다

 

윗집 세탁기 물이 흘러내려

내 방바닥을 채우고

앉은 채로 두 무릎 탁탁 부딪치며

얼어붙어도 좋다

빨래 헹군 섬유 찌꺼기

비린내도 좋고

 

무엇이든 좋다 겨울은

배관 수리비로 집주인과 다퉈도 좋다

다투다가 봄을 맞아도 좋고

 

기다리지 않으면 더 좋다

봄은 너를쉽게 찾아내므로

방이 얼고

비눗물이 새고

끓는 물에는 커피 한 봉 넣으면 좋다

 

 


 

 

임곤택 시인 / 대화의 일치

 

 

그가 물었다, 어두운데 잘 보이지?

 

가로등이 빗줄기를 비추고

반짝이는 빗줄기를 맞으며 우리는 걷고 있었다

 

빗방울을 밀쳐내며 지붕들이 조금씩 변했다

빗소리는 벽돌 유리창 취기로부터 왔다

不和의 힘으로 저녁이 깊었다

 

검은 것 한 덩어리가 지붕을 건너

다음 순간으로 사라졌다

유혹과 애간장의 무늬들이 오밀조밀

빈 곳으로 밀려들었다

귓속에서 젖은 고양이들이 자랐다

 

어둠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들었던 팔다리를

내리고, 이런 말들로 우리는 남김없이 표현되었다

 

일치하고 있었다

발, 디딘 곳과 빗방울 그리고

나머지 물기와 어둠

 

어두운데 정말 잘 보이네, 대답했다

한 걸음씩 옮겨졌다

약동 진입 거부 탈출의 동작으로

몸의 水深이 계속 채워졌다

 

-시집 <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 중앙일보플러스

 

 


 

 

임곤택 시인 / 오후의 느낌과 여행을 떠나자

 

 

이렇게라도 바람이 불고 한 대씩

자동차 지나가고

늙은 여자는 애초부터 늙도록 되어 있어서

더 예쁜 것을 얻어서

딸을 얻은 사람은 그렇게 행복해져서

 

살아 있어서 참 좋은 오후

두 사람이 탄 오토바이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싼다

셋이 탄 자동차는 바퀴가 넷

등에는 배낭이 있고

 

이런 꿈을 꾼다

좋은 오후와는 어떻게든 늦게 만나서

채소를 함께 다듬고

반쯤 죽은 것에 물을 뿌려 반쯤 살리고

게으른 아이는 그냥 놔두면 된다

 

되도록 멀리 가기로 하였다

비가 예보되었다

가방에는 더 많은 자랑과 남는 식욕

뒤에 앉은 사람이 손가락 뻗어

저 앞을 가리킨다

 

둘인 듯 셋인 듯 그 이상인 듯

주머니엔 숟가락 하나씩

모처럼 하루가 빼곡히 채워지는 날

어쩌나, 그치기 싫다

 

-시집 <죄 없이 다음 없이> 걷는사람

 

 


 

 

임곤택 시인 / 버스 증명

 

 

틀림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버스 기사의 오른쪽 발과 몇 번의 신호 대기

줄을 선다 솔직해지기 싫어서

흔들린다 인정해야 할 일이 있다

발을 디딜 때

물 흐르듯 흐르는 몸은 불가능한 곡예

소금기 하얀 어부의 손바닥

겨울은 무엇이든 잘 썩지 않는다

면목동에서 청량리 지나 성북구청에 닿는 동안

어떤 행인이 아버지를 떠오르게 했을 뿐

두꺼운 바지를 입어야 하는 겨울

두꺼운 바지를 입은 겨울

당신들아, 뭉쳐진 채로 이렇게

그대로구나

입김은 한참 동안 흩어지지 않는다

밖에 있는 그가 말하고 안에 선 그녀가 대답하는 사이

아이는 뽀드득 창을 문지른다

버스는 증명하기 어렵다

버스 기사의 동작은 거의 변하지 않고

어둡다 많다

구분할 수 없다

 

 


 

 

임곤택 시인 / 국화빵 만드는 여자

​꽃을 꺾고 잎을 따는 시늉의 손짓

스스로 숯을 삼키고 벙어리가 된 자객처럼

여자는 국화 무늬를 새긴다

올겨울에는 전대미문의 추위가 닥칠 거라고, 누군가 신문보도를 인용하고

 

여자는 역수(易水)를 건너 환생한 자객

가을 깊어도

이번 세상과는 아무 관계도 나누지 않는

 

반듯하게 잘린 시체 위에 몇 송이 국화꽃을 던지듯

봉지가 채워지고

짧은 목례가 마지막으로 교환된다

 

 


 

임곤택 시인

전남 나주 출생.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4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지상의 하루』 『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 시론서 『현대시와 미디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