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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애경 시인 / 가로등이 있는 숲길
초여름 저녁 어스름 산책로로 접어드는데 파득, 하고 가로등이 날개 펴는 소리가 들렸어요 올려다보니 빛의 씨앗이 점점 붉게 더 환하게 켜지더니 밤의 우주를 향해 열린 커다란 등대가 되더군요
내 마음도 가로등처럼 켜져서 우주를 향해 그대, 나 외로워! 라고 나와 밤하늘만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외쳤어요
빛의 빠르기로 대답이 와도 몇천년 후에야 이 자리에 도착할지 몰라요
산새가 가쁜 내 숨소리를 따라와서 자기도 답. 답. 해. 답. 답. 하다고 나무 위에서 큰 소리로 울어줬어요
하늘엔 초승달과 별이 마주보며 저렇게 수줍게 열려 있는데
밤이 다가온 숲과 사람이 사는 마을 사이 저렇게 아름다운 불빛들이 걸렸는데......
양애경 시인 / 땅이
사람 나이 80이 넘으면 땅이 몸을 마구 끌어당긴다 한쪽 다리를 들어 한 걸음 옮기려는 것뿐인데 산을 뿌리째 뽑아 옮기는 듯
그래서 키가 줄고 허리도 허물어진 그저 체중이 45킬로그램 나가는 엄마의 몸이
지나가다 내 팔에 툭, 걸리기라도 하면,
나까지 땅속까지 끌려 들어갈 것만 같다. 깊이 묻혀 다시는 못 올라 올 것만 같다 비명을 지르며 나 혼자 멀리멀리 도망쳐버리고 싶어진다
노인과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 해도...
땅이 마구마구 밑으로 잡아 당기면...
양애경 시인 /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날마다 한치씩 가라앉는 때 주변의 모두가 의자째 나를 앉으라고 한다고 나 외의 모든 사람에겐 웃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될 때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 눈길 스치는 곳곳에서 없는 무서운 얼굴들이 얼핏얼핏 보일 때 발바닥 우묵한 곳의 신경이 하루 종일 하이힐 굽에 버티느라 늘어나고 가방 속의 책이 점점 늘어나 소용없는 내 잡식성의 지식의 무게로 등을 굽게 할 때
나는 내 방에 돌아와 바닥에 몸을 던지네 모든 짐을 풀고 모든 옷의 단추와 걸쇠들을 끄르고 한쪽 볼부터 발끝까지 캄캄한 속에서 천천히 바닥에 들러붙네 몸의 둥근 선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온몸을 써서 나는 바닥을 잡네 바닥에 매달리네
땅이 나를 받아주네 내일 아침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그녀가 나를 지그시 잡아주네.
양애경 시인 / 사랑
둘이 같이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문득 정신차려 보니 혼자 걷고 있습니다
어느 골목에서 다시 만나지겠지 앞으로 더 걷다가 갈증이 나서 목을 축일 만한 가게라도 만나지겠지 앞으로 더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참 많이도 왔습니다
인연이 끝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가야 합니다
많이 왔을수록 혼자 돌아가는 길이 멉니다
양애경 시인 / 만약 내가 암늑대라면
내가 만약 암늑대라면 밤 산벚꽃나무 밑에서 네게 안길 거다 부드러운 옆구리를 벚꽃나무 둥치에 문지르면서 피나지 않을 만큼 한 입 가득 네 볼을 물어떼면 너는
만약 네가 숫 늑대라면 너는 알코올과 니코틴에 흐려지지 않은 맑은 씨앗을 내 안 깊숙이 터뜨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해처럼 뜨거운 네 씨를 달처럼 차가운 네 씨를 날카롭게 몸 안에 껴안을 거다
우리가 흔들어 놓은 벚꽃 둥치에서 서늘한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져 달아오른 뺨을 식혀줄 거다
내 안에서 그 씨들이 터져 자라고 엉기고 꽃피면 (꽃들은 식물의 섹스지) 나는 언덕 위에서 햇볕을 쐬며 풀꽃들 속에 뒹굴 거다
그러다 사냥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워진 내 곁을 네가 떠나버린다면 그래서 동굴 안에서 혼자 새끼들을 낳게 한다면 나는 낳자마자 우리의 새끼들을 모두 삼켜버릴 거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겠지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내 곁을 지키면서 눈시울을 가느다랗게 하면서 내 뺨을 핥을거다
후에 네가 수컷의 모험심을 만족시키려 떠난다면 나는 물끄러미 네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거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는 다른 수컷의 뺨을 깨물 거다 평생을 같은 수컷의 씨를 품는 암늑대란 없는거니까
내 꿈은 무리에서 가장 나이 들고 현명한 암컷이 되는 것 뜨거운 눈으로 무리를 지키면서 새끼들의 가냘픈 다리가 굵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나는 거기까지 가는 거다 이 밤이 산벚꽃나무 밑동에서 출발하여 해 지는 언덕 밑에 자기 무리를 거느린 나이 든 암컷이 되기까지
양애경 시인 / 최면
당신의 어깨 당신의 등 나를 보고 있지 않은 당신의 등 (하지만 날 보고 있죠? 그죠?) 내게 말을 걸어요 강력히 다가오라고 당신을 만지라고 당신 살에 내 살을 대라고
하마터면 그럴 뻔했죠 수많은 아는 사람들 눈앞에서 정신을 잃고 강력한 최면이군요 그래서 당신의 뒷모습은 긴장해 있죠 보일 듯 말 듯 근육이 떨고 있죠 정말 이런 말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당신을 먹고 싶어요 사과처럼 한 잎 크게 깨물어.....
양애경 시인 /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오랫만에 친구를 만났다 같이 있으면 자유로워지는 사람 팔장을 끼면 우리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야기 하고 웃을 뿐 개찰구 안으로 배웅하고 돌아서 왔다 갑자기 공기가 무겁게 무겁게 어깨를 누르고 아까보다 낮아진 하늘 낯선 건물들 저마다 잘난 척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행인들 자유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 진실로 완전하다 헤어지며 눈물이 솟는 것은 내가 외롭기 때문이다 알아도 일생중 그런 친구를 몇 사람만 더 가지게 해 주소서 얼굴도 모르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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