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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연명지 시인 / 태극기를 품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2.
연명지 시인 / 태극기를 품다

연명지 시인 / 태극기를 품다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조국의 광복을 그리던 핏빛 함성이 스며든

어떤 소년병들의 갈가리 찢긴 세계를

온몸으로 안아주며 눈물 흘렸을 태극기의 사랑을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치열했던 전쟁의 조각들이 흩어져있는

국가라는 등짐을 지고 죽어간

어떤 소년병들의 잃어버린 꿈으로

얻은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거칠고 쓸쓸하게 변해버린 이 땅

잿더미를 디디고 일어나 세운 것이

태극기의 힘이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붉은 마음 검은 가시 곱게 쓰다듬으며

희망을 심어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의 눈이 그 희망의 꽃에 다가오고

길처럼 대한민국을 끈으로 이어준다는 것을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어서 아름답듯이

세상과 나 사이에 온몸으로 서 있는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세계를 다스리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연명지 시인 / 나비 주의

 

 

 나비가 그리워 이마가 아픈 날에는 아토차역으로 간다

 

 어느 구간과 구간 사이로 속옷을 잃어버린 나비 한 마리 아찔하게 날아다녀도 나비의 생각을 가져오지는 말아

 

 기울기가 다른 구름이 모여드는 오후, 누군가 놓아버린 바람의 한때가 무심하게 흘러간다 날개 안의 나비는 가끔씩 실종된 속옷을 찾아 허둥대는 악몽을 꾸고, 날개 밖의 나비는 소란으로 가득 찬 아토차역을 서성인다.

 

 너는 조금 부끄러워도 괜찮은 거니

 사람들 눈을 잠그고 싶구나

 

 아슬아슬 보였다 사라지는 나비의 숨결을 두고 기차는 떠나가고, 남겨진 눈들 서로의 시선을 비껴간다 먼 곳에서 온 순례자들만 모르는 들큼한 풍경이 민망하게 지나가고, 마드리드 나비도 한때는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생각을 듣는다.

 

 바람에 일렁이는 은어들이 그렁하니 떨어지고

 

 너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생급스레 美쳤구나

 

 


 

 

연명지 시인 / 연두의 등이 사라진 후

 

 

연두를 켜면

연두의 페이지마다 물오르는 소리가 들려요.

무덤들마다 첫 봄이 오고

첫 연두들이 돋아요.

특별한 계책(計策)도 없이

몇몇의 생전을 배치했어요.

 

연두가 부푸는 느낌은

혹시 젖몸살일까요?

갓 입성한 죽음들은 무얼 먹고 자랄까요,

잊혀 질까요.

 

심장 연두색 풀들이 돋는 밤

종이컵으로, 다녀가라고 술 한 잔 부어 주었어요.

 

연두의 두께 속에 빗방울들이 자랄 거예요.

웃자란 연두들이 책을 뚫고 엉킬 거예요.

안부를 햇빛 틈바구니에 놓아두고

마주보고 있다는 말은 닿을 수 있을까요

이름만 붙어있는 벽에 손을 대고 서성이다.

읽게 되는 사람들의 일생

침묵하라는 묘비명은 없지만

아무도 입을 열진 않아요.

 

연두의 문을 열면 하늘색으로 변한

시집 한권이 서있어요.

 

 


 

 

연명지 시인 / 산실주의보

-사리아

 

 

 한 번도 아버지를 불러보지 못한 옹알이

 어디에 내려놓을까

 

 소멸의 눈빛이 또렷해지는 새벽, 후회 같은 것에 발목을 잡히지 말아야 했다 마음을 두드리는 땅끝의 소리를 밀어낼 수가 없어 그 의 마음이 위독해졌다 길은 누군가의 눈물을 동여매 주는 긴 팔을 가졌다 사리아 강에 옹알이를 풀어놓으며 눈을 감는다 함께 하 지 못한 시간을 용서할 수 없어

 붉은색 우비를 입고 발의 고백을 들여다보는 굵은 빗방울이 놀소리에 귀를 열고 입을 닫는다

 

 천국의 영혼이 새벽의 눈꺼풀을 쓸어주듯이

 길은 저 혼자 울고 난 후 눈부시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제와 다른 얼굴로 부엔까미노는 앞서가고

 

 옹알이는 이제 아버지라는 말을 습득했을까

 

 


 

 

연명지 시인 / 봄이 슬픔을 켜는 동안

 

 

신이 인간의 몸속에 숨겨놓았다는 행복은

왼쪽 갈비뼈 사이에 끼어 숨조차 쉬지 못하고

신이 여자에게 슬픔을 재능으로 주었다는 한 페이지를 생각한다

 

해안선 가까이 발을 포개고 울다간 새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가슴을 되돌아 올라오는 눈물이 일제히 팔을 벌린다

넘치는 눈물을 어디에 담을지 젖은 모래속에 발을 묻는다

 

열 일곱의 심장을 나누어 먹고도 여전히

파도 소리 왁자한 바다

바람의 갈피마다 먹구름이 끼어있다

 

누구도 모르는 어두운 비밀 창고

햇빛도 다가 갈 수 없는 그곳에서

매일 한자씩 깊어지는 슬픈 죽음이 연주되고 있다

 

잠깐 집 떠나기 전날의 싱싱했던 목소리가

울음의 사막을 건너간다

이제 바다는 하루만 살아 돌아와 달라는

젖은 목소리로부터 돌아 앉아 귀를 접었다

 

잠을 자지 못하는 물고기의 입김이 말라간다

 

 


 

 

연명지 시인 / 얼음 가운

 

 

하얀 가운을 입은

앵무새의 회진(回診)

호수(戶數)가 매겨진 방들을 돈다

 

지금은 기계를 입고 숨을 쉬고 있지만

멀지 않아 숨을 묶는 시점이 올 것입니다

 

학습이 덜 된 새가 얼음 하고 말하면

침대위의 남자는 손을 파닥이며

땡하고 날 숨을 쉰다

앵앵앵, 얼음 앵앵앵, 얼음

우리의 귀는 당나귀 귀

슬픔이 고여 오는 귀를 씻으며

앵무새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준다

 

알고 보면 새들의 날개는

온전한 날개가 아닙니다, 일종의 손이죠

 

눕지 않아도 되는 병은 없나요

모든 병은 치유의 시작

치유는 또 다른 죽음의 연장입니다

그러니 이제 얼음 땡 놀이의

종결어미를 학습하세요

자유롭게 마침표를 땅, 하고 찍으세요

 

앵무새는 학습의 왕

경과와 예각을 청진하는 회진의 왕

입은 진료실에 두고 퇴근하는 것이 어떨까요

 

 


 

 

연명지 시인 / 마음과 눈 사이의 남자

 

 

눈이 쏟아지고

눈이 허물어지고

눈이 녹고

 

차도를 한 남자가 걷는다

위태로운 자세로 하루의 등짐을 무겁게 지고

하얀 눈발이 부러지는 거리를 걷는다

빵빵거리는 건 저 너머 세상의 일

 

눈과 눈이 만나 폭설을 이룬 도시에서

귀를 막고 눈을 막은 모르는 남자가

눈에 스며늘어 녹아내리고 있다

먼 곳으로 가는 남자 등 울고 있다

 

구름의 그늘이 떨어지며

눈의 우울도 깊어진다

저녁의 근심이 도로를 가둘 때

남자의 슬픔이 함박눈으로 내린다

 

자동차들이 느리게 간다

경계가 없어진 차도에서

눈발에 얼굴을 묻고 울던 그 남자는

눈문을 밀고 겨울의 나라를 지나간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백처럼

눈이 내리는 날에

 

 


 

연명지 시인

1960년 충북 괴산 출생, 2014년《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가시비』 『사과처럼 앉아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