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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병승 시인 / 너무 작은 처녀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0.
황병승 시인 / 너무 작은 처녀들

황병승 시인 / 너무 작은 처녀들

 

 

소년도 소녀도 아니었던 그 해 여름

처음으로 커피라는 검은 물을 마시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삐뚤삐뚤 엽서를 쓴다

 

누이가 셋이었지만 다정함을 배우지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아름다운 치마가 빨랫줄을 흔들던 시절

거울 속의 작은 발자국들을 따라 걷다보면

계절은 어느덧 가을이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놓아둔 흰 자루들

자루 속의 얼굴 없는 친구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스무 살의 나에게 손가락글씨를 쓴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새들은 무거운 음악을 만드느라 늙지도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젖은 치마가 빨랫줄을 늘어뜨리던 시절

쥐가 되지는 않았다 늘 그 모양이었을 뿐.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처음으로 코밑의 솜털을 밀었고

처음으로 누이의 젖은 치마를 훔쳐 입었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쥐가 되고 싶었다

꼬리도 없이 늘 그 모양인 게 싫어

 

자루 속의 친구들을 속인 적도 상처를 준 적도 없지만

부끄럼 많은 얼굴의 아이는 거울 속에서 점점 뚱뚱해지고

 

작은 발자국들을 지나 어느새 거울의 뒤쪽을 향해 걷다 보면

계절은 겨울이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시간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어둠 속에서

조금 울었고 손을 씻었다

 

 


 

 

황병승 시인 / 고양이 짐보

 

 

내가 갸르릉거리면요,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요

내 이름은 짐보 나쁜 친구들과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아요 쥐는

옛날부터 싫었구요 이 골목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죠

 

세탁소집 아이는 미용사가 꿈이구요 열여덟에 결혼한 수리공 마키는

말할 때 눈을 찡긋거리는 버릇이 있고 대장장이 키다리는

아침부터 술이지요

 

내가 밤늦도록 갸르릉거리면요,

당신이 천방지축 꼬마였을 때 내가 아프게 할퀸 적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딴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시답잖은 얘기예요 고양이에게 왕국이니 전설이니.......

당신들보다 나이를 조금 더 먹었을 뿐 내 이름은 짐보

지붕을 뛰어넘다 애꾸가 되었구요 동네 고양이들은 나를 점프 왕 짐보

그렇게 놀리더군요 나쁜 마음을 먹을라치면 벌써 먹었죠

우리 고양이들은 칼날 같으니까요

그러나 눈이 꼭 두 개일 필요 있나요 친구들은 이 마을 저 마을

들쑤시고 다니지 못해 안달을 하지만, 많이 안다고

다 아는 건 아니죠 내 이름은 그냥 짐보 이 골목만큼은

눈 감고도 걸을 수 있죠

 

내가 만일 밤늦도록 갸르릉거리면요,

당신은 아직 꼬마고 당신은 울고 싶은 일이 참 많고

그러나 그 모든 게 지난 밤, 짐보가 할퀴고 간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당신들보다 나이를 조금 더 먹었을 뿐

딴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황병승 시인 / 고양이와 자라는 소년

 

 

왼쪽 골목을 지나

오른쪽 커브를 돌며

소년은 고양이를 집어던진다, 너 안녕

때린다 팜 팜 두 번 팜 팜 팜

더 이상은, 안 돼....

 

늘 혼자인 소년

길어지는 그림자

문제trouble 없인 아무것도 자라지 않아

왼쪽 뺨의 흉터로부터

태어난 날

오른쪽 발톱의

무덤을 향해

날아가는 고양이

어차피 천국은 건설되는 것이 아니지 않아

팜팜 두 번 팜 팜 팜

더 이상은......... 싫어,

당장이라도 얼마나 멀리 날아갈 수 있는지

얼마나 빨리 외로워지고 마는지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괜찮아

언제든 이빨 썩을 준비가 되어 있어

 

파라솔 아래

중얼거리는 소년

끈적한 테이블 작은 사이즈의 막대 사탕

 

죽어도 좋아

주먹을 내려다보는 소년

사라지는 달콤함의 시간들

 

.......너의 티셔츠에선 언제나

검은 줄무늬 고양이 냄새가 나

 

 


 

 

황병승 시인 / 문門

 

 

문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나는 조금씩 늙어간다

 

당신을 만난 이후로 나는 몇 개의 문을 기억하고 있다

아끼는 책의 한 페이지를 넘기듯 열고 닫았던

후미진 골목의 카페 유리문과

빈방이었지만 나의 노크 소리를

당신의 목소리로 되돌려주던 키 큰 푸른색 문이며

읽지도 않은 페이지를 구겨버리듯 박차고 나오던

몇 개의 문들을 나는 기억한다

 

당신을 만나러 갈 때마다 당신 보다 먼저 만나며

당신 보다 더 오래 이별하는 문 앞에서

한 시절이 흘러갔다

 

가끔 그때의 문 앞에 다시 설 때가 있다

문 저편엔 어김없이 당신이 있지만

그러나 문을 여는 순간

 

당신은 또 다른 문 뒤로 숨어버릴 것이므로

 

문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당신과 나는 조금씩 늙어간다

 

 


 

 

황병승 시인 / 잔디는 더 파래지려고 한다*

 

 

 저 오래된 유리창의 무늬들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긋고 지나가는 칼날 같은 무늬들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속삭이는 소리,

 안타깝다 그러나 결국 아름답다,

 온 마음을 다해 가로세로 안달을 하는 이야기

 

 주제는 무엇인가 주제에, 주제가, 주제를 모르고

 '그는 혹은 우리는'으로 시작하는 이 모든 고백의

 홈 타운에서의  피치 못할 좌절스러움들...

 

 그러나 금년에도 역시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

 치키 붐 치키 붐, 내일은 숨은 그림처럼,

 내일은 아무도 태어나지 않을 것인데

 

 너희 집 뒷마당의 우리 집 고양이 짐보야,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라니

 세수하고 발 닦고 쥐처럼 자자, 그게 좋다,

 그것대로 맛이 있다 야아옹 야아아옹,이라고

 짐보의 친구들은 언제나 이 골목 저 골목

 쏘다니며 두리번거린다

 이렇게 말을 한다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거리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뽀삐,

 언젠가 한번 이 곳에 와본 적이 있는데,

 기억을 되찾으려는 듯 머리 를 터는 뽀삐,

 짧은 머리의 남자에게 질 질 끌려서였지, 아마도 개처럼

 뽀삐는 땅 냄새를 맡는다,

 킁 킁 기분이 별로여서, 킁킁 기분이 도무지 별로여서......

 

 어떠한 다짐들,

 어떠한 다짐들이 우리 아이들의 기분을 '별로'로

 만드는 걸까

 너희 집 다락 속의 우리 집 불쌍한 처남은,

 어떠한 고민으로 다짐의 굴레 속을 헤매는 걸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내 머리를 빗겨주었어

 아 좋은 냄새가 난다 좋은 냄새가 나

 나 처음으로 가족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처음으로 가족을 가지면 큰일 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

 호주머니 속의 뭉개져버린 토마토는 밤새 질척거리고

 지난밤의 모든 것들을 호의로 받아들여

 오늘 밤은 더럽게 지저분 하다, 아 싫은 냄새....'

 

 싫은 냄새 속에서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덤가의 노을이 유난히도 질펀하게 흐르는 날

 누나는 어때? 매형은? 우리 집에 놀러 와, 액션!

 액션!

 머릿속을 가득 메운 크고 튼튼한 토마토들,

 깨물면 피, 터지겠지.....

 

 너희 집 다락 속의 우리 집 불쌍한 처남이 떠올리는

 가능한 액션들, 저 오래된 유리창의 무늬들처럼,

 죽음을 향한 실수 연발들

 

 그러나 한번 삐끗하면 그뿐, 항상 배울 게 있지

 

 으나야, 우리들이 죽음을 모르던 그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야성적이었니

 하지만 지금은 이가 녹아 식물이 되었구나,

 노래한다

 

 노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 움큼의 알약을 집어삼키고, 시야 가득 물결치는

 도형들의 호흡을 따라 우리는 여행을 떠났네

 유일한 즐거운 놀이 어제는 떡갈나무 숲에서

 도형 총집함을 덮고 잤고,

 그제는 그제는 이름도 모르는

 녹색 타이즈의 소녀들과 물결 키스를

 

 그리고 오늘은 최초의 무서운 꿈이 있었다

 소녀들은 갑자기 똑바로 말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빨강이었고, 우리는 도형인 데다 눈물이 흘렀다.

 꿈속에서,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세계는 금세 피멍이 들고

 (빌어먹을 성가신 저 밍따오들......)

 

 이 골목 저 골목을 배회하며

 우리는 공중 높이 술잔을 집어던지고

 우리는 동시에 등을 돌리는 것이다

 각자의 머리 위로 조각조각 빛나는

 작은 이빨들의 요란한 인사와 함께 치얼스!!!

 

 그러나 제발이지, (웃기고 자빠졌네)

 

 언제나 경쾌하고 쿨하게 돌아서려 했지만,

 왜 왜 입을 가린 채 아픈 목소리들의 기침은 멈추지 않는지,

 쿨해지려고 할수록 언제나 콜드 쪽이다.

 중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글쓰기, 창피하게도

 내일은 아무도 태어나지 않을 것인데.....그래도 걷기로 했던 날,

 너희는 빨리 우리는 느리게, 죽어가는 아름다운 로제 언니와

 하루 종일 걷기로 했던 날, 너희는 흰 모자를 썼고

 우리는 뭔지 모를 흰색을 좋아했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눈이 내리고,

 새악했던 것보다 너희가 사랑하고 해치우고,

 사랑할지 해치울지 망설이던 것들은 훨씬 더 많더구나,

 2005년 10월 19일

 

 죽음이 있기 전에 조금만 쓰자**

 

 그러면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잔디는 더 파래지려고 한다.

 

*짐 자무시의 영화 「커피와 담배」중에서.

**피터 잭슨의 영화「천상의 피조물」중에서

 

 


 

 

황병승 시인 / 앙상블

 

 

골방의 늙은이들은 우물쭈물하지

죽음이 마치 올가미라도 되는 양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가들

인생이 마치 가시밭길이라도 되는 양

 

알약을 나눠 먹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소녀들

환각이 마치 지도라도 되는 양

 

편지를 받아든 군인들은 소총을 갈겨대지

이별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양

 

술에 취해 뒹굴며 자해하는 노숙자들

육체가 마치 실패의 원인이라도 되는 양

 

각별하고 깊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침묵이 마치 그 해답이라도 되는 양

 

놀람 속에서 바라보는 시인들

순간이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양

 

 


 

 

황병승 시인 / 멜랑콜리호두파이

 

 

배가 고파서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꿈속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나 하나 때문에

무지개 언덕을 찾아가는 여행이 어색해졌다

 

나비야 나비야 누군가 창밖에서 나비를 애타게 부른다

나는 야옹야아옹, 여기 있다고, 이불 속에 숨어

나도 모르게 얼었다

그러는 내가 금세 한심해져서 나비는 나비지 나비가 무슨 고양이람,

괜한 창문만 소리 나게 닫았지

 

압정에, 작고 녹슨 압정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

팔을 절단하게 되면, 기분이 나쁠까

 

느린 음악에 찌들어 사는 날들

머릿빗, 단추 한 알, 오래된 엽서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괜스레 미워져서

뒷마당에 꾹꾹묻었다 눈 내리고 바람 불면

언젠가 그 작은 무덤에서 꼬챙이 같은 원망들이 이리저리 자라

내 두 눈알을 후벼주었으면.

 

해질녘, 어디든 퍼질러 앉은 저 구름들도 싫어

오늘은 달고 맛좋은 호두파이를 샀다

입 안 가득 미끄러지는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

뱃속 저 밑바닥으로 툭 떨어질 때

어두운 부엌 한편에서 누군가, 억지로.

사랑해...... 하고 말했다.

 

 


 

황병승 시인 (1970-2019)

1970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2003년 《파라21》에 〈주치의 H〉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등. 201년 제11회 박인환문학상. 2013년 제13회 미당문학상 수상. 2019년 7월 24일 요절함(향년 4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