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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수 시인(장수) / 미루나무에게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2.
김경수 시인(장수) / 미루나무에게

김경수 시인(장수) / 미루나무에게

 

 

언제부턴가 내 가슴에

나무 한 그루

키우고 있었지

 

척박한 아비의 땅에

푸르게 흔들리던

키 큰 그림자로

 

세월이 빨리도 미끄러져 갔을

도시 한복판에

한숨짓는 바람소리

 

잘려나간 밑둥을 보며

하얀 꽃가루가 된 머리위로

조각구름의 질주

 

지상에서 가장 큰 나무로 알았는데

가장 하늘에 가까운 나무로 알았는데

누구나처럼 작은 강가에 서서

얼큰한 취기로 바람을 잠재워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

 

 


 

 

김경수 시인(장수) / 모월모일-황금달팽이

 

 

예전 숲길이 아닌

딱딱한 길을 가고 있던

그대들이여

잠시 쉬어,들어보라

이 세상에

나 같은 슬픔 지닌 자

어디에 있었겠는가?

땅 마르고 숲 멍들고

풀잎 시들어

나무 없는 숲속엔

숨마저 쉴 수 없는

나를 불쌍히 여겼으리라

세상 공적 하나 없는 사람들

이젠 자신을 후회하며

자연사랑 유달리 깊어져

생명이 살 수 있는 자리에

날 앉혀 놓고

부러운 팔자 만드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안도의 속삭임

"어찌 이처럼 아름다운 황금빛일까?"

 

 


 

 

김경수 시인(장수) / 소통(疏通)

 

 

그래도 가끔은

깊이를 모르는 저마다 가슴속에

뜨거운 사랑 이야기 한 토막 안고 산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있는 것은 없는 것처럼

닫힘의 속도는 오래된

망설임 앞에 그렇게 출렁인다

 

내가 조용히 서 있는 곳에서

먼저 문을 두드리면

오래된 희망 몇 장

문이 열리고

살며시 숨 토하며

제 속의 붉은 마음 열어 보인다

 

그것은 검푸른 바다 위에 파도치는

밖과 문안의 길

DMZ

웃으며 넘어야 하는

아름다운 부대낌이다.

 

 


 

 

김경수 시인(장수) / 말, 통일의 말들

 

 

통일은 꿈꾼다

주위를 흔들어 대는 말에 따라

그럴듯한 가설은 천국이다

시간은 가로누워 일어설 생각이 없고

같은 흙을 밟고 살아온 팔십 고개

한여름

하늘의 구름처럼 시간을 쪼개어 본다

수많은 말의 구멍이 뚫려있다

서로 다른 허황한 소리가 넘나들던 구멍이다

바람은 그어놓은 선의 경계를 빠르게 달리며

꿈의 속도를 저울질하고

숨 가쁘게 죄어오는 죽음의 문턱에서

잡힐 듯 다가오는 씨앗처럼

환한 그 말들

기다림은 길고 멀어

하나둘씩 세상의 끈을 놓고 있다

 

-제 5회 통일문학상 수상 작

 

 


 

 

김경수 시인(장수) / 옥수역에 내리면

 

 

옥수역에 눈을 뜨면

물장구치는 해를 볼 수 있다

그 찬란한 금빛들 속으로

광란과 역경의 시간이 들춰지면

내 어릴 적 고향의

딸 부잣집 딸고마니에 대한

어른들의 천대와 구박받던 일들

일순간 수면위로 떠올라

일천오백 볼트* 고압이

침묵했던 뺨을 후려친다

슬픔과 고통

안타까움의 분노들이

레일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뽀얀 안개 뒤집어 쓴 채 잠에서 덜 깬

서울의 물방울들을 거둬들인다

우린,

옥수역에 내리면

意識을 일깨워 물장구치는

해를 볼 수 있어 좋다.

 

* 전동차 직류공급전압

 

 


 

 

김경수 시인(장수) / 아, 긍개 봄날엔

 

 

 봄날엔 향긋한 나물이 제일이다. 나물 중에도 으뜸인 여린 순잎의 두릅, 이른 봄 늦잠을 뚫고 올라온 모습의 두릅은 어머니의 고단함을 품은 듯 쌉싸래한 향기와 맛이 들떠있는 입맛을 유혹한다.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먹거나 석쇠에 구워먹어도 좋을, 그 시절 어머니의 봄나물 보따리에는 두릅과 취나물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섬유질과 칼슘 비타민이 풍부한 반찬으로, 김밥 속 재료로, 부침 반죽 위에서는 화려한 변신으로 입맛을 돋궈주던, 젊은 시절 봇짐 속 가득한 어머니의 봄나물이 더욱 그리운 것은 자연의 모든 먹거리들이 풍성하고 무공해였기 때문이리라.

 

 “아 긍개

 봄날엔 가난한 친정집 가는 것보다 먹을 것이 많은 산에 가는 게 낫다고 않혀”

 

시집 『기수역의 탈선』 2019. 도서출판 연자

 

 


 

김경수 시인(장수)

1957년 전북 장수 출생. 1980년 <해변문학> 詩作 활동, 문학평론가. 시집 <미니스커트와 지하철> <사람들은 바람을 등지고 걸으려 한다> <바위풀> <안개바람,안개비> <물꼬> <기수역의 탈선> 등, 한국착각의시학연구회 회장, 창작아카데미 지도시인,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문화정책위원, 한국문인협회 이사, 계간 종합문예지 '문학과 현실' 주간. 제1회 '한국글사랑문학상', 제10회 '한국농민문학상', '제6회 한국문협 작가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