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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재일 시인 / 겨울 목련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2.
하재일 시인 / 겨울 목련

하재일 시인 / 겨울 목련

 

당신은 나의 별이라고 쓸까 하다가

그냥 따뜻한 설경이라고 쓴다

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계절이라고 쓸까 하다가

그냥 비탈에 선 어둠이라고 쓴다

쓰러지지 않는 한 그루 꽃나무라고

바람을 견디는 등불이라고 쓸까 하다가

다시 나의 캄캄한 절벽이라고 쓴다

닿을 길 없는 벼랑 끝 바람이라고 쓴다

내 안의 갸륵한 기도라고 쓸까 하다가

차마 눈보라 치는 흐린 날이라고 쓴다

마침내 엄동嚴冬을 견딜 꽃눈이라고 쓰고 만다

 

-시집 『코딩』에서

 

 


 

 

하재일 시인 / 배추밭

 

야, 이눔아ㅡ

배추도 석 달이면 속이 차는데

니눔은 언제쯤 속이 차는 겨ㅡ

냅다 소리 지르는 우리 엄니

햇살과 이슬만 먹고 힘줄 굵어지며

실뿌리 땅 밑으로 잔잔히 내리는 적막강산

가을 배추밭에서

알이 꽉 차 방긋방긋 웃는 놈들을 보며

철 늦은 몸살이라도 났으면

 

 


 

 

하재일 시인 / 아까워하지 마라

 

주인이 가지를 쳐내면

그해 사과는 씨알이 잘고

남이 가지치기를 하면

사과는 가을에 틀림없이 굵다

온종일 텅 빈 과수밭에서

햇살에 실려 오르락내리락,

꽃눈 하나하나에 눈 맞춰가며

어떤 사랑을 잘라낼까

어떤 사랑을 남겨둘까

솎아내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으리

남은 사정없이 가지를 칠 수 있지만

주인은 모두 아까워서 망설이기 때문이다

제발 아까워하지 마라

 

 


 

 

하재일 시인 / 약수터

 

낮잠 자는 사내가 와 있다

양파 장수 수박 장수 차가 와 있다

신축 빌라 즉시 입주 깃발도 나부끼고

LPG 고압가스 차도 와 있다

고추잠자리가 허공에 와 있다

전라도 말과

경상도 말

충청도 말이 함께 와 있다

손녀와 강아지도 와 있고

환자도 술꾼도

간밤 부부 싸움했던 사람도 와 있다

혼자서 물통 몇 개 들고

당신도 맨 끝줄에 와 있다

 

 


 

 

하재일 시인 / 벼꽃이 필 때

 

벼꽃이 필 때 나는 지나쳤네

남몰래 울기 시작한 한낮을 모르고

숨죽이며 다가온 바람을 건너서

벼꽃이 필 때 그냥 스쳐갔네

그 누구도 견디기 힘든

뜨거운 사랑이 피는 줄 모르고

들판을 질러 더위를 피해서

벼꽃이 필 때 그냥 흘러갔네

 

 


 

 

하재일 시인 / 코딩

 

나는 방 안에 들어온

구름 한 장을 낚아챈다

구름은 놀라서 길을 잃고

잠시 허둥지둥

재빨리 강가에 다녀온 나는

물을 채우고

구름을 냄비에 넣고 끓인다

물은 구름을 만나서 즐겁다

면과 양념을 잘 섞어

단번에 구름라면 완성!

이제 시작이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구름이

저렇게 셀 수 없이 많으니

 

 


 

 

하재일 시인 / 뜰 앞의 벚나무

 

일찍이 하얀 꽃을 보낸 후

너도 세상과 한 빛이 되었다

여름내

초록으로만 지낼 것

느티나무 옆 그늘 아래서

그냥 쉬고 있을 것

내년 봄까지 실업 연금이나

타 먹으며 숨어 지낼 것

제발 화려했던 꽃은 잊고 살 것

 


 

하재일 시인

1961년 충남 보령 출생. 공주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 1984년 월간《불교사상》 만해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아름다운 그늘』 『선운사 골짜기 박봉진 처사네 농막에 머물면서』 『달팽이가 기어간 자리는 왜 은빛으로 빛날까』 『타타르의 칼』 『코딩』 『동네 한 바퀴』 『달마의 눈꺼풀』 등. 공저 청소년시집 『처음엔 삐딱하게』 등. 현재 백신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