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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일 시인 / 겨울 목련
당신은 나의 별이라고 쓸까 하다가 그냥 따뜻한 설경이라고 쓴다 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계절이라고 쓸까 하다가 그냥 비탈에 선 어둠이라고 쓴다 쓰러지지 않는 한 그루 꽃나무라고 바람을 견디는 등불이라고 쓸까 하다가 다시 나의 캄캄한 절벽이라고 쓴다 닿을 길 없는 벼랑 끝 바람이라고 쓴다 내 안의 갸륵한 기도라고 쓸까 하다가 차마 눈보라 치는 흐린 날이라고 쓴다 마침내 엄동嚴冬을 견딜 꽃눈이라고 쓰고 만다
-시집 『코딩』에서
하재일 시인 / 배추밭
야, 이눔아ㅡ 배추도 석 달이면 속이 차는데 니눔은 언제쯤 속이 차는 겨ㅡ 냅다 소리 지르는 우리 엄니 햇살과 이슬만 먹고 힘줄 굵어지며 실뿌리 땅 밑으로 잔잔히 내리는 적막강산 가을 배추밭에서 알이 꽉 차 방긋방긋 웃는 놈들을 보며 철 늦은 몸살이라도 났으면
하재일 시인 / 아까워하지 마라
주인이 가지를 쳐내면 그해 사과는 씨알이 잘고 남이 가지치기를 하면 사과는 가을에 틀림없이 굵다 온종일 텅 빈 과수밭에서 햇살에 실려 오르락내리락, 꽃눈 하나하나에 눈 맞춰가며 어떤 사랑을 잘라낼까 어떤 사랑을 남겨둘까 솎아내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으리 남은 사정없이 가지를 칠 수 있지만 주인은 모두 아까워서 망설이기 때문이다 제발 아까워하지 마라
하재일 시인 / 약수터
낮잠 자는 사내가 와 있다 양파 장수 수박 장수 차가 와 있다 신축 빌라 즉시 입주 깃발도 나부끼고 LPG 고압가스 차도 와 있다 고추잠자리가 허공에 와 있다 전라도 말과 경상도 말 충청도 말이 함께 와 있다 손녀와 강아지도 와 있고 환자도 술꾼도 간밤 부부 싸움했던 사람도 와 있다 혼자서 물통 몇 개 들고 당신도 맨 끝줄에 와 있다
하재일 시인 / 벼꽃이 필 때
벼꽃이 필 때 나는 지나쳤네 남몰래 울기 시작한 한낮을 모르고 숨죽이며 다가온 바람을 건너서 벼꽃이 필 때 그냥 스쳐갔네 그 누구도 견디기 힘든 뜨거운 사랑이 피는 줄 모르고 들판을 질러 더위를 피해서 벼꽃이 필 때 그냥 흘러갔네
하재일 시인 / 코딩
나는 방 안에 들어온 구름 한 장을 낚아챈다 구름은 놀라서 길을 잃고 잠시 허둥지둥 재빨리 강가에 다녀온 나는 물을 채우고 구름을 냄비에 넣고 끓인다 물은 구름을 만나서 즐겁다 면과 양념을 잘 섞어 단번에 구름라면 완성! 이제 시작이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구름이 저렇게 셀 수 없이 많으니
하재일 시인 / 뜰 앞의 벚나무
일찍이 하얀 꽃을 보낸 후 너도 세상과 한 빛이 되었다 여름내 초록으로만 지낼 것 느티나무 옆 그늘 아래서 그냥 쉬고 있을 것 내년 봄까지 실업 연금이나 타 먹으며 숨어 지낼 것 제발 화려했던 꽃은 잊고 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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