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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강록 시인 / 망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2.
황강록 시인 / 망각

황강록 시인 / 망각

 

 

 시를 쓰려고 보던 숏폼을 멈추고, 메모앱을 실행하려다가 내가 왜 보던 숏폼을 멈추었는지 잊어버렸다. 멍하니 영리한전화기(스마트폰)를 들여다보며 잠시 멈춤... 내가 뭘 하려고 했었지?

 

 그리고 잠시 슬퍼진다.

 

 어떤 친구는 더욱 난해해지기를 택함으로써 치매를 극복하려한다고 하고

 또 어떤 친구는 반려동물과 소통하여, 동물적 단순함을 터득함으로써 모든 불안을 잊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난 어릴 적의 꿈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들은 항상 어른이 된 뒤에는 삶이라는 스토리의 절정에서 엔딩을 보거나 '그 후로 언제까지나 계속 행복했습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 담엔 '아무려면 어때?”

 

 그래 아무려면 어때? 꿈을 이루었던 이루지 못했던, 꿈을 꾼 적이 아예 없었건... 그 후엔 나의 것이 아닌 물리 법칙과 사회 법칙과 신의 법칙이 나를 계속 이끌고 가겠지? 노화가 진행될 테고, 병과 사고가 찾아오고, 모든 관계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겠지?

 

 망각하기 위해 시를 쓴다. 강렬하고 감당하기 힘든 상념이 밀려올 때 나는 시를 씀으로써 서둘러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표현한 후, 망각한다. 시를 쓰고 나면 마치 격렬한 성욕 이후의 사정(射精)과 그 후의 피로와 평온함처럼... 불편하고 끈적한 상념 덩어리는 해소되고 망각된다. 내 집이 어디고 내 주민번호는 뭐더라...?

 

 가장 깊은 진리를 깨닫고, 죽음을 극복하고, 지고의 행복을 맛본다 해도... 나는 계속 나이기를 바랄까? 정신을 차리고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이미 죽은 가축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인가?

 

 ...시를 쓰던 것을 멈추고, 어쩔 줄 모른 체 뭘 해야 할지 생각한다. 숏폼을 계속 봐야하나? 내가 보던 숏폼이 어떤 거였지? 그런데 이렇게 하면 치매를 극복할 수 있는게 맞나? 아니면 난 이미 치매에 걸려있는 건가...

 

 


 

 

황강록 시인 / 겨울

 

 눈 덮인 오후에 너에게 편지를 씁니다. 세상은 잠 속인 것처럼 고요합 니다. 내 이야기를 하려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네 이야기를 하려니 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얀 눈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지지만 아프거나 출지 않습니다. 고통을 과장하지 않던 습관이 어느새 고통을 무시하게 만 든 것은 아닌가 ··· 반성이 됩니다. 만약 이 피가 나의 것이 아니라면 더더 욱 그렇겠지요. 문득 편지를 쓴다 해도 너에게 가 닿을지 걱정이 됩니다. 바다에 눈물을 떨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 방울의 짠물이 바다에 무슨 말 을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니 눈으로 뒤덮인 온통 하얀 침묵이 나로 하 여금 너를 떠오르게 했고,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느끼게 만든 것 같 습니다. 언제 너를 만났는지 네가 누군지도 온동 하얀 ···

 

 이 풍경 속으로 그냥 걸어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너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릅니다. 눈 덮인 오후는

 

 잊거나, 사라지는 것이 너무 잘 어울립니다.

 

 


 

 

황강록 시인 / 죽은 친구를 꿈에 보다

 

 

바다가 그립니? 조심스럽게

 

내가 네게 물었을 때, 아니 다시는 그 무거운

청록색 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때 넌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너는

듀공*처럼 귀여워졌구나, 날카롭던 이빨은

납작해졌고, 얼굴과 몸은 둥글기 만

하다. 큰 덩지에 졸린 듯이, 우스운 듯이 눈을 껌벅이며

 

생각해 보니 이렇게 대책 없이 크고, 둥글어져도

되는 곳은 바다 밖에 없잖아

 

견딜 만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무거운

청록색 공간은 싫어. 네가 짧은 앞발로 툭툭

물장구를 치며

 

말했다. 아니 말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했다

 

바다에는 말이 없으니까, 기억도...

 

네 안부를 알게 되어 기뻤다

 

 


 

 

황강록 시인 / 광장

 

 

 낡은 인간들이 새로 변한다. 우린

 부스러진 더러운 깃털과 울음소리를 들었을 뿐, 어디선가

 

 누군가의 자식들이 성의 없이 울고,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스팸 전화로 우린 짜증이 나 있지만 이 낡은 거리에

 

 이렇게나 새가 많았던가? 우리는 이 새들의 이름을 알았나? 살아온 역사는?···광장엔 태극기들이 흩날리고, 목사는 스피커로 난해한 기도를 쩌렁쩌렁

 

 외치고 있지만, 저 많은 새들은 날개가 있음에도

 날아가려 하지 않고, 노래할 수 있음에도

 노래하지 않고, 그저 과자 부스러기나 취객의 토사물을 찾아서 먼지처럼 우수수···

 광장의 이곳과 저곳을 돌아다닌다. 한 끼니의 절망과 분노가 편의점 전자레인지에서 데워지고

 

 누군가의 자식들은 엄마, 아빠가 새로 변한 것을 알지 못한다. 그저 도시 환경을 탓하고, 바뀌는 입시제도에 적응하느라 바쁠 뿐이다. 아이들이 수능을 준비하는 뒷골목 학원가에도 새들은 모여 있고, 더 나이 든 아이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원 촌 지붕에도 불청객처럼 옹기종기···

 낡은 사람들이 새로 변한다는 소문은 뉴스에도 나오지 않고, 시사 다큐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새는 불길하다며 새에 대해 보도하던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 변할지도 모른다며···흩날리는 태극기들 너머 새들이 마지못해 드디어

 

 난다. 마지못해 웃는다. 소주와 국밥 한 그릇짜리 일당을 좇아, 우수수···마치 회색의 건물들이 부스러져 떨어지는 것 같다. 아주 높은 아파트들이 꼭대기에서부터 부스러져

 떨어지는 것 같다. 누군가는 날아오르는 것 같고, 누군가는 노래하는 것 같다. 난 이 슬프고도 우스운 풍경을 보고 있기 힘들다. 하지만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것 같기에

 아무도 소식을 알리거나

 신고하거나 보도하고자 하지 않는 것 같기에

 

 눈꺼풀이 없는 물고기 천사처럼

 크게 눈을 뜨고 바라볼 뿐, 새들이 부스러져 떨어지듯

 날아가는 것을

 

-시집 『조울』 에서

 

 


 

 

황강록 시인 /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

 

이런 어색한 일은 될수록 피해 왔다

 

아버지가 밥을 차려주었고

나는 꼼짝 않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 같은 건

 

될수록 피하고 싶은 어색한 일

이었다. 가급적이면 떠들썩하고, 정신없이 바쁘고···그렇게 어떨결에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일

 

아버지는 늙은

얼굴만 빼고는 몸이 모두

낡은 기계로 되어 있었다. 삐걱거리고 균형

을 잘 잡지 못했다. 무척

오랫동안 그 불편한 기계로

험한

일들은 해왔었나 보다. 당연히

아버지 혼자서 밥을 찬찬히, 맛있게 차려 본 적이 없기도 할 테고······

 

아버지가 차린 맛없는 밥을 우린

말없이 먹었다. 원래

아버지와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오죽하면

 

이번이 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된 후, 한참이 지난 후에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출연한 꿈일까 말이다. 매우 드문

 

그 순간을 아버지와 난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알 수 있었다.

 

난 쑥스럽지만

기계 몸으로 삐걱대며 일어서는 아버지를 처음으로 부축했고

쑥스럽지만

좀 더 자주 아버지와 이렇게 단둘이 천천히 밥이라도 만들어 먹을 걸 그랬다고

말했고 쑥스럽

지만······

 

꿈이 끝나기 직전에 입을 겨우 열어서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난 아버지가 수줍어하고 있고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깨어나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현대시』 2023-9월(405)호

 

 


 

 

황강록 시인 / 따

 

 

구성원 전체의 나이가 비슷한 어떤 부족이 있었다. 그들은

부족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게 천재지변 때문이든 누구 하나의 잘못 때문이든,

편을 갈라 싸웠기 때문이든 상관없이

가장 약한 아이를 골라 돌아가며 한 대씩 때리는 걸로

집단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항상 같은 애가 맞는 게 아니라

한 번 맞은 애를 빼고 나머지 애들 중에서 가장 약한 애를 골라

한 대씩・・・

 

세게 때린 놈도 있고

공평한 강도로 때린 놈도 있고

살짝 때린 놈도 있고

 

그러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한 번씩은 맞았고

결국 가장 강한 아이도 맞게 되는 날이 왔다. 하지만

 

가장 강한아이

그동안 애들을 항상 풀스윙으로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애들은 턱이 돌아가거나 반신불수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아이를 세게 때리지 않았다.

그동안의 살벌한 장면들이 마치 농담이었다는 듯...

 

“야 ᄉᄇ 세게 차라니까 ᄏᄏ"

"ᄋᄋ 이거 ᄌᄂ 세게 친 건데 ᄏᄏ"

 

하여튼 이것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풍경이었고

아이들 중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과정에서 몇몇의 아이들은 반신불수가 되거나 사망했으며

특히 가장 약한 축에 들던 어떤 아이는 거의 피범벅이 되어

(뒈졌x)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중에

항상 맞는 애를 작살을 냈던,

아마도 집단에서 두세 번째쯤으로 강하던 애가

 

자기가 맞을 순서가 왔을 때

실실 웃으며 “때려 봐 때려 봐” 하다가

제일 센 놈이 턱뼈가 돌아가도록 갈기자

 

나머지 애들에 의해

피범벅이 되어 사망하게 된

의외의 정의가 실현된 경우데 대해선

예외로 치기로 한다 해도

 

이 가혹한 제도로 인해

나아가 비슷한 그 부족은 서로 평화를 유지하였으며 심지어

 

다른 부족들을 착취하고 군림하고, 지배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 부족의 약한 아이들이 얼마나 처참한 꼴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살아남아 증언할 사람이 거의 없으니 이쯤 되면

훌륭한 제도라고 해야 하나

완전범죄라고 해야 하나

 

부족 구성원들 간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던 무렵

부족의 약한 아이들은 아무 말도 다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꼴을 당했다.

비록 민주적으로

한 사람이 한 대씩 공평하게 때렸을지라도 말이다.

하여간 어떤 제도 하에서건

 

사람은 의외로 약하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죽는다

비록 그중에서 맷집이 좋거나 처신을 잘해서, 운이 좋아서

네가 살아남았다 해도

 

네가 가해자였건 피해자였건,

단지 결과적으로 지금 살아남았을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월간 《현대시》 2023년 9월호,

 

 


 

 

황강록 시인 / 아이

 

 

어느 오후

 

가만히 앉아서

생각들의 파문이 퍼져나가는 걸 멍하니 보고 있다가

 

문득 굉장히

끔찍해졌다

 

무엇을 만났던 걸까

 

내 안에서

 

...겁많은 아기가 빽빽 울고 있었다. 무서운듯, 뭔가 바라는 듯.

아무리 달래보고, 야단쳐도 소용 없어서

시끄러워서

 

그냥 놔둔다

 

아무것도 안 한다

아무것도 안 하다가 문득 돌아보니

 

괜찮다. 기분이 좋아졌다

 

또 어디 갔었길래...

 

모르는 꽃 따들고 웃고 있는

 

 


 

황강록 시인

196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철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0년 월간 《현대시》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 『지옥에서 뛰어놀다』 『벤야민 스쿨』. 현재 시인, 작곡가, 공연 연출가로 활동 中. 1998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무대예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