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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영중 시인 / 두 사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2.
주영중 시인 / 두 사람

주영중 시인 / 두 사람

 

 

두 개의 첨탑 위에 두 개의 십자가가

완전한 대칭이다

나는 그것이 비 내린 밤의 거리와 새벽 거리의

또 다른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하마처럼 느린 하품 너머

두 개의 십자가가 유난히 빛나는 것은

병실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이며

정물처럼 서고 누운 두 사람 때문이다

 

다른 시간에 똑같은 곳을 바라보는 방법으로

마치 계란을 위아래로 세우는 방법으로

침상에 누운 그를 바라본다

 

변검술사가 가면을 바꾸듯

그 변검의 사이에,

그의 얼굴이 잠시 흔들리고

창에 매달린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아버렸다

 

불빛이 블라인드를 넘어

아름다운 칼처럼 방안을 가르는데

그의 발톱은 자라

허공을 약간 밀어냈을 뿐이다

 

창 너머 크레인의 높이에서 바라본

차갑고도 아름다운 거리

올 장마는 풍성하고 오래 지속된다

 

누구나 한 번쯤 정물이 되는 때가 있다

한 세계가 열렸다 닫히는 것처럼

나는 영혼이 없는 유리를 지나

쓰러진 나무들을 지나

허공의 문들을 열고 또 열어보는데,

 

 


 

 

주영중 시인 / 광명역에서

 

 

공룡의 뼈 안으로 도달한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공룡 꼬리처럼

영혼은 기억합니다

 

문상하러 가는 길

보이지 않는 스핀

사라진 빛으로 빛의 자식이 돌아간 시간

 

우울이 쌓아 올린 거대 철골 구조물

뭉개진 빛살이 몸을 감싼다

한때 수만의 빛이 나를 무너뜨리던 순간이 있었다

 

낯선 도시에 내리는 빛들

초록의 빛이 숲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표백된 표정으로 광역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집으로 집으로

 

바람 불던 겨울 초입

눈 감은 두덩 위로 바알간 기운이 여명처럼 떠오를 때

칼끝에 잠시 머물다 가는 빛 조각

태초를 간직한 빛 조각에

발바닥까지 허물어질 때가 있었지

 

야음이 내린 역

눈이 멀 것 같은데

투명한 이물질이 흘러나오네

사랑의 광기에 발맞추던

달빛이 몸을 뚫고 지나가네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은 느닷없이 찾아오고

나를 이루던 구조물도 알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데

 

눈이 먼 꿈처럼

꿈에라도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꿈꾸듯 광명역에서

 

-『계간파란』 2023-가을(30)호

 

 


 

 

주영중 시인 / 몽상가의 팝업스토어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이곳은 무한의 골방이자 공명의 성소, 기다림과 얽힘의 무한궤도 불쑥 하고 열릴 겁니다 언뜻언뜻 떠올라 올 때가 있을 겁니다 무심코 들르세요 당신의 시간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날 순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상념의 거리를 걷다 당신은 그저 발길을 돌려 자동문 너머로 스르르 들어오면 됩니다 언어들이 나비처럼 떠다니고 무정형의 층마다 무정형의 공간이 튀어나올 겁니다 당신은 아득한 빛 속으로 증발하기도 하고 다른 차원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습니다 놀라지는 마세요 어디선가 다시 솟아날 테니까요 진열된 감정 앞에서 시계의 초침이든 바람이든 나뭇가지든 그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시면 됩니다 이곳은 곧 당신입니다 당신이 가진 송신기에 어떤 번호를 입력해도 언제든 연결될 겁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블랙홀 같은 가게에서

 

 


 

 

주영중 시인 / 박수무당

 

 

이곳과 저곳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란

남의 운명을 가만히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란

 

불편한 응시

미지의 기운이 이끄는

힘의 자장을, 몸으로 정녕

무심히, 누군가

 

운명을 잠시 손으로 만지고 간 것처럼, 누군가

눈으로 운명을 응시하고 간 것처럼

심장이 뛴다

 

멀리 내다보는 일이란, 허망한

무섭거나 소름 끼치는

아주 멀리에서

심장과 심장이 잠시 조우하는 일이란

운명이 잠시 겹쳐지는 일이란

불가해하고도 먼,

 

 


 

 

주영중 시인 / 구름의 서쪽

 

 

내륙을 적시는 바이칼 호

침묵처럼 말이 번진다

 

태양을 등진 채 구름의 서쪽으로,

떠나는 자로서 나는 묻는다

 

왜 이리 황량한가, 입국 불허자의 심정이 되어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버려진 사람처럼

 

타인에서 타인으로, 바깥에서 바깥으로

몰래 손님처럼

 

나는 잉여의 냄새를 쫓는 추적자

윤리를 버리고 잉여를 취하는 사냥꾼

 

나는 굴러다니는 돌, 굴러다니는 얼굴

입술의 말단에서 찌그러진 음성이 터져 나온다

 

미지의 그림자에 이끌려

심장이 향하는 쪽으로,

 

시간이 게워 놓은 것들을

기꺼이 응대할 것

 

나는 결국 그들에게로 이르는 끊긴 다리일 뿐

물음은 안에서 오고 바깥에서  온다

 

가령, 고요와 불안이 교차하는 곳에서

혁명은 싹텄는지 모른다

 

사랑할 수 없는 날이 오면,

떠날 것

무언의 직물을 짜고 있는 구름처럼

 

물음은 떠남에 있지

그래도 떠남은 돌아오는 것

 

나는 지나간 것들을 모르고

너는 잊는 기술을 모르고

 

저기 버려져 비옥한 검은 흙들을 넘어

소음이 나를 몰아가는 곳으로

 

-시집 <결코 안녕인 세계> 민음사

 

 


 

 

주영중 시인 / 점령군처럼

 

 

 그는 오늘 아침 후투티로 현현했으며 산딸나무 하얀 꽃잎으로 피어났다

 

 한동안 오지 않던 그가 점령군처럼 왔다

 은밀한 햇빛 속에서 산란하던 먼지들처럼

 

 무자비한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얼마든지 공간을 점유한다

 왜 그런 자가 존재를 들켜 오래도록 어린 아기의 울음과 기이한 웃음과 모방의 언어를 흘리는 걸까

 

 그윽한 도둑처럼 사라지거나

 한 움큼의 물로 두 손을 빠져나가는

 

 생활을 조금이라도 지우지 않는다면 결국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

 

 바람이 휘저은 구름 호수에 젖은 저물녘

 거꾸로 오르는 엘리베이터 물에 빠진 아파트 물의 벌어진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던 그가 쏟아진 아가미로 낙낙한 숨을 쉬고 물로 된 밥과 물로 된 반찬 물로 된 칼날의 통증

 

 눈에서 나온 물이 호수와 뒤섞이고 그리하여 그는 둥근 물의 평원과 알지 못할 물의 나라 물의 대지로 나를 인도했으며

 물의 평등 물의 침범 물의 언어 물의 사랑 물의 행적을 보여 주었다

 드디어는 물의 광란 물의 해일에 이끌리는 시간

 피가 물처럼 설레고

 그의 얼굴은 물살로 기억되기도 한다

 달빛, 두려움의 냄새가 풍기어 왔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어색한 악수를 나누고

 무한의 공간을 응시한다

 오염된 거라구

 나쁜 공기에 떠다니는 얼굴

 잠시,

 무정형의 데스마스크

 

 어느 날 물속으로 사라진 거미가 은빛 줄을 튕겨 쇳소리를 연주했고

 나는 늘어진 시간을 잡아당겨야 했다

 두 손에 탈장된 언어를 그러쥔 채 죽은 언어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시집 『몽상가의 팝업스토어』에서

 

 


 

 

주영중 시인 / 폐허의 섬에 닻을 내리는 시간

​지구의 일부는 어둠으로 잠들고

바닥은 드러누운 백지가 된다

나에게는 자장가가 필요하지

나의 집은

하찮은 노래로 가득하고

너를 향한 여정은

유리 같은 거미줄처럼 위태롭네

가을 초입의 온도는 슬퍼

사이프러스 숲에는 다시 죽음의 빛들만이 오가는데

수줍은 소년처럼

폐허의 섬에 닻을 내리는 시간

수많은 말과 영상이 겹쳐 지나고

바람도 불지 않는 곳

폐허와 태허 사이

차가운 불명의 섬

더없이 좁은 적멸보궁

비명이 오장육부를 돌아나가는

너를 향한 무반주 여행

지구는 어둠으로 잠들고

나에게는 자장가가 필요하지

-계간 포엠포엠 2023 봄호 중에서

 

 


 

주영중 시인

1968년 서울에서 출생. 2007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고려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현재 고려대 BK21 한국어문학교육연구단 연구교수. 서일대 문예창작학과 강사. 시집 <결코 안녕인 세계> <생환하라, 음화> <몽상가의 팝업스토어> 등. 저서 <현대 시론의 역학적 구도>. 현재 대구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