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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민주 시인 / 나무의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3.
양민주 시인 / 나무의자

양민주 시인 / 나무의자

 

 

폐교된 초등학교 교실엔

산을 그리워하는 나무의자가 있다

늘 앉아만 있는 의자가 있다

부러진 의자엔 기울어진 구도로

거미들이 집을 지어 쉰다

옹이 빠진 의자 구멍 속으로

보리밥 먹는 까만 눈동자와

바닥에 오줌을 흘리는 아이가 보이고

의자를 슬그머니 빼자 벌러덩 넘어진

친구의 모습과 웃음소리 날아오른다

미혼인 선생님의 뜻 모를 큰 눈과 화장실

청소하던 어린 시절이 어우러지고 있다

벽에 붙은 담쟁이덩굴 타고

가끔 발 없는 별이 내려오거나

갈고리달이 구름의 목말을 타고 놀 때

어둠은 의자에 앉아 쉬어간다

삶의 한 자락을 내어줄 수 있던

옛날의 네가 되고 싶은 나는

산을 그리워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양민주 시인 / 빈방

 

 

아내 이르기를

빈방에 우두커니 앉아 웬 청승이람!

일순간, 모순

빈방은 내가 없고

청승만 있어야 한다

청승은 사람을 따르는 그림자 같은 것

내가 없고 청승만 있는 것을

아내는 알고 있었다

삶이란 존재의 부재

딸이 떠난 빈방에

청승이 앉아있다.

 

 


 

 

양민주 시인 / 우물가 플라타너스

 

폐교된 초등학교 운동장 가장자리

우물 옆 커다란 플라타너스

도르래 달린 우물은 속이 깊어 컴컴했다

양철 두레박을 내리면 텅 소리가 나고

물을 떠올리면 절반은 흘러내렸다

학교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플라타너스 열매를 따 차고 노는 일

땀나면 우물가로 가 주린 배를 채우는 일

우물가 플라타너스는 왜 그리 키가 큰지

파란하늘 똥구멍에 닿아있었다

플라타너스는 우물물을 많이 마셔서

크게 자랐다고 생각했다

가을이 오면 잎 떨어뜨리고

동그란 열매를 달았다

열매의 긴 꼭지를 잡고

친구 이마를 딱 치면

'아야' 소리와 함께 부풀어 오르던

'뽕탱이 나무'라 불리던

그 나무가 걸어온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빙빙 돌고있는

나를 발견한다

 

 


 

 

양민주 시인 / 숲

 

 

한여름에 찾는 숲

목적지로 가던 길 접고

숲에 들렀더니

숲 모퉁이를 헐고

고속철도공사 한창

수수 백 년 지켜온 팽나무

뽑혀 쓰러진 자리에 박힌

굵은 콘크리트 기둥

숲 위로 철길 지날 참인데

팽나무, 비스듬히 누워

남은 숲에 작별을 고한다

두고 가는 숲이 가여워

포크레인에 부러진 가지 사이로

눈물 철철 흘린다

떠나는 나무가

남겨진 나무를 걱정한다

 

 


 

 

양민주 시인 / 휴일 아침 침대에 누워

 

 

해는 아직 동천에 있을 터

새들의 지저귐에 눈을 뜬다

천장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누워서 어제 쓰다 만 문장을 생각한다

가도賈島*의 퇴고堆敲처럼

서풍으로 할지 하늬바람으로 할지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보리밭의 청보리가

서풍에 흔들리면 어떻고

하늬바람에 흔들리면 어쩌랴

새들의 지저귐이 오래인 것을

 

 


 

 

양민주 시인 / 양파 산성

 

 

고향에 가면

붉은 망에 양파를 담아

아스팔트 길가에 성을 쌓아 놓았다

성은 산에만 쌓는 줄 알았다

성은 모난 돌로만 쌓는 줄 알았다

성은 옛날의 유물인 줄 알았다

풍년이 들수록 성은 길게만 쌓이고

그만큼 불신의 벽은 단단해지고

성문에는 굽은 허리 짚고

뒷걸음치는 지팡이로

양파 뿌리 같은 머리카락이 경계를 선다

날 세운 햇빛을 앞세워 후드득

쳐들어오는 한줄기 소나기

오락가락하는 장맛비 전쟁에

썩어 허물어지는 성곽

가증스러운 각다귀 떼가 점령한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란 걸 알면서도

해마다 아버지는 성을 쌓았다

 

 


 

 

양민주 시인 / 아내의 낯꽃

 

 

 쉰의 중간에 선 아내, 불 밝힌 생일 케이크 앞에 두고 사진을 찍는다

 실루엣 불빛에 가려진 주름살 잊고 사진을 찍는다

 

 엄마는 왜 이렇게 이뻐

 다 큰 아들 말에

 아내는 낯꽃을 활짝 피운다

 

 그래. 예쁘다는 말보다 예쁜 것이 있겠냐 오가는 세월 앞에 무뎌져 감정마저 허물어져 허풍마저 불지 않는 마음인데 자식 허풍 아니고서야 어디. 아내의 낯꽃을 보랴

 

-시집 <산감나무>에서

 

 


 

양민주 시인

1961년 경남 창녕 출생. 부산공대(현 부경대) 기계과 졸업. 인제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졸업. 2006년 《시와 수필》을 통해 수필로, 2015년 《문학청춘》을 통해 시로 등단. 수필집 『아버지의 구두』와  시집 『아버지의 늪』 『산감나무』가 있음. 현재 김해문인협회 회장이며 인제대학교 문리과대학 행정실장. 2015년 제11회 원종린수필문학 작품상 수상.